새 차

by Ann

적응할 시간도 없이 칼바람이 종아리를 벤다. 원래 12월 초가 이렇게 추웠나, 매년 겪으면서도 익숙해지지 않는 추위. 겨울이 참 싫다. 여러모로.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커피를 마시고 저녁을 먹었다. 솔직하게는 친구의 딸 없이 단둘이 만나 원 없이 수다를 떨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그녀와 그녀의 딸과 셋이 만나 듬성듬성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야기는 끊기고 시선이 이리저리 옮겨졌지만 올해가 가기 전에 얼굴 봤으니 그걸로 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는 이야기야 뭐 다 비슷하겠지.


그 친구와 저녁을 다 먹어갈 때쯤 한때 친구 결혼 전에 다 같이 친하게 어울렸던 오빠에게 연락이 와 잠깐 같이 보았다. 친구 딸의 반응이 나와 있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목소리 톤이 한층 높아졌고 애교가 많아졌다. 둘은 약간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둘은 결혼식과 장례식 때만 보는 사이가 되어버렸으니까. 결혼이란 그런 걸까. 결혼은 애매한 관계들을 깨끗하게 정리해주는 하나의 계기가 되어주는 것 같다.


나는 글을 쓸 때나 말을 할 때 '~인 것 같다'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 것 같다. 방금도. 확신에 찬 의견을 내놓는 것이 어렵고 두렵다. 또 그런 사람을 그렇게 신뢰하지는 않는다. 사실 모든 문장의 끝을 '~같다'로 써야 할 것만 같다. 같다. 같다......


친구는 아이 때문에 잠깐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와 그 오빠 둘만 남아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오랜만이다, 그래도 올해가 가기 전에 한 번 더 보는구나, 배고프다, 여자 친구와는 잘 지내냐, 사는 게 재미없다 등등의 말들을 주고받았다. 가볍게 공중으로 휘휘 날아가는 말들이었다.


마주 앉아서 누군가와 계속 문자를 보내더니 일어나자고 했다. 친구와 밥을 먹기로 했다고. 주섬주섬 옷을 입고 일어나 카페 밖으로 나갔다. 추웠다. 그래도 어제보단 덜 추웠다. 우리는 그 오빠의 차가 세워져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가는 길에 그 오빠는 새 차를 뽑았다고 했다. 그 오빠를 처음 볼 때부터 있었던, 번호가 참 특이했던 카키색 포르테가 떠나고 새 차가 왔다고. 나에게도 추억이 있는 차였는데 이상한 섭섭함이 문득 들었다. 엉뚱하게도.


조금 걸어가자 낯선 새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어색했다. 그 오빠는 외간 여자를 태우는 건 처음이라고 했다. 다행히 여자 친구는 며칠 전에 태웠다고. 그래서 다행이라고. 첨엔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 했는데 뒤에 이어진 말들을 듣고 알아차렸다. 새 차에 여자 친구 말고 다른 여자를 먼저 태웠으면 좀 찔릴 뻔했는데 다행히 여자 친구가 먼저 새 차를 탔다는 말이었다. 그게 뭐가 중요한지, 그리고 그게 왜 찔리는 일인지 캐묻고 싶었지만 대충 어떤 마음인지 이해는 되어서 아무 말 않고 조수석에 앉았다. 시트가 차가웠다. 차 안 공기도.


그 차를 탄 두 번째 여자로 조수석에 앉아 집에 가면서 문득 누군가의 첫 번째가 된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1순위가 된다는 것. 나도 그런 때가 있었는데.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지만 잠시나마 누군가에게 우선순위가 된다는 게 얼마나 설레고 행복해지고 따뜻해지는 일인지.


하지만 곧잘 잊곤 한다. 그게 얼마나 소중한 순간인지. 감사한 순간인지. 따뜻한 순간인지.


그 오빠는 집 근처 정류장에서 세워달라는데도 집 앞까지 태워다 줬다. 고마웠다. 차가웠던 시트와 차 안 공기가 이제 막 따뜻해지려는데 내려야만 했다. 차문을 여니 여며지지 않은 옷 사이로 찬 바람이 들어왔다. 잘 가라고 짧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바로 겉옷을 여미고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갔다. 바람 때문에 꽉 닫히지 않는 현관문이 위잉 소리를 냈다. '그래 나도.' 하고 대답했다.


그래 나도. 오늘은 나도 외로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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