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거, 그것 좀 하자."
엄마는 마르지 않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엄마가 말하는 '저거'를 나는 금방 알아들었다.
"아, 지금은 귀찮아. 엄마 걸로 그냥 해."
나는 읽고 싶은 책이 있어 이제 막 그 책의 커버를 들어 올리는 중이었다. 엄마는 저거, 즉 나의 초강력 바람을 뿜어대는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려달라는 것이었다. 몇 번 그걸로 엄마의 머리를 말려드렸는데 꽤 만족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일단 빨리 마르니까.
내가 계속 책을 읽고 있자 엄마는 내 방으로 들어가는 것 같더니 그 드라이기를 가지고 나왔다. 순간 나는 짜증이 났다.
"아! 엄마 걸로 하라니까 그냥. 그것도 금방 말라!"
엄마는 반응 없이 하던 일을 계속했다.
"아, 고장 나 그거!"
"고장 나면 사면되지."
"엄마가 사줄 거야?!"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고 나의 구시렁 소리는 드라이기 소리에 먹혀버리고 말았다. 분명 엄마에겐 나의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걸 알면서도 나는 계속 짜증의 말들을 쏟아냈다. 자기 돈 주고 산 것도 아니면서. 자기 드라이기도 있으면서. 어쩌고 저쩌고.
책을 눈으로 읽으면서 입으로는 온갖 짜증의 단어들을 내뱉고 있는 내가 순간 우스웠다. 엄마 말대로 그 드라이기가 닳는 것도 아니고 머리 한 번 말린다고 고장 나는 것도 아니고 그 드라이기에 들어가는 전기료도 내가 내는 것이 아닌데 뭐가 그렇게 싫다고 온갖 짜증을 내고 있는 건지. 책 표지를 만지작거리면서.
그런데 나는 화가 났다. 나는 누구든 나의 허락을 맡지 않고 나의 물건을 만지거나 사용하는 것을 싫어한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물건에 대한 소유욕이 강했다. 물건은 무척이나 깨끗하게 썼다. 대부분의 물건들이 다 새것 같은 상태를 유지했다. 지금도 나의 물건들은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동안이다. 그렇게 나이가 들어 보이지 않는다. 2012년에 만들어진 아이들도 마치 어제 태어난 아이들처럼 깨끗하다.
이런 나이기에 부모, 자매간에도 예외는 없다. 동생은 이런 나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이해해주려고 한다. 가끔 책을 빌려가는데 무척 조심스럽게 보고 갖다 준다. 그런 배려 덕분에 동생에겐 조금씩 관대해진다. 하지만 엄마는 달랐다.
엄마는 그런 나를 치사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깟 드라이기라고 생각했다. 맞다. 그깟 드라이기. 그게 뭐라고. 하지만 난 엄마가 나에게 정중하게 부탁하길 바랐다. 엄마의 물건은 아니지만 필요해서 나에게 빌려야 한다면 아무리 부모 자식 간이라고 해도 허락을 구하길 바랐다. 이런 상황이 아니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제아무리 대통령이라고 대통령 할아버지라고 해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면 양해를 구해야 한다. 부탁을 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엄마는 초강력 드라이기로 머리를 다 말렸다. 엄마가 머리를 말리는 동안 난 단 한 글자도 읽을 수가 없었다. 이런 생각들을 하느라.
읽히지도 않는 책을 덮고 씻었다. 다 씻고 방으로 돌아와 보니 드라이기는 몸의 반 이상을 집 밖으로 내밀고 있었다. 엉망으로 엉킨 선과 함께. 그래, 이래서 내가 싫어했던 거야. 내가 쪼잔한 게 아니라고.
내가 쪼잔한 게 아니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드라이기를 정리했다. 하지만 여전히 엄마는 나를 쪼잔한 딸로 여기고 있겠지. 뭐 그럼 어때. 엄마는 나에게 막무가내 제멋대로인 엄마인 걸. 이렇게 또 내일 티격태격할 가족인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