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Inside Wisdom

소설을 읽는다는 것.

김영하의 '읽다'를 읽고.

by Ann



무제.png 김영하 - 읽다




역시나 좋았다. 이전 '보다', '말하다'가 좋았던 만큼 좋았다. 쉽고 편안하게 읽히는 책이었다. 그리고 내 머릿속을 차지했던 수많은 물음표 풍선들이 하나둘씩 팡팡 터져나감을 느꼈다.



언제부터인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무작정 책을 읽기로 한 나는 읽으면서 꼭 무언가는 얻어내야만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책을 대해왔다. 어떤 종류의 책이든 말이다. 비교적 자기 계발서나 인문서는 그것이 뚜렷하게 보이는 반면 소설이나 에세이는 나를 약 올리듯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아 결국 억지로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래야 내가 책에 투자한 시간이 아깝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시간 낭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무서웠다. 내가 하는 일이 전혀 생산성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불안했다. 그런데 이 책이 이런 나의 불안과 두려움을 옅어지게 만들어주었다. 마치 창문의 성에가 서서히 사라져가듯 말이다.




우리가 가지 않아도 산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어떤 소설은 우리가 읽든 말든 저 어딘가에 엄연히 존재합니다. 우리는 소설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접근하고, 그것으로부터 강력한 영향을 받고,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입니다. 독자는 소설을 읽음으로써 그 어떤 분명한 유익도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소설을 읽은 사람으로 변할 뿐입니다.




분명히 읽었는데 읽었다는 사실만 기억나는 소설들이 있다. 특히 지금도 읽도록 권장되는 여러 고전 소설들. 언급이 될 때마다 읽은 기억이 있어 내용을 상기시키려 하지만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 책을 읽는다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렇게 까맣게 잊었는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심지어 다른 사람들에게 '잘난척용'으로도 사용이 불가능하다. 전혀 기억이 안 나니 말이다. 그때 읽었던 책들이 지금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친 것일까. 또 영향을 끼쳤다면 과연 좋은 영향일까? '제인 에어', '죄와 벌'과 같은 책들은 지금 나의 어느 부분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일까. 이런 나의 물음들에 김영하 작가는 '다만 그 소설을 읽은 사람으로 변할 뿐입니다.'라고 말한다.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뭐라 말로 설명할 순 없지만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책을 읽는 나를 말이다.




소설가니까, 왜 소설을 읽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먼 길을 돌아왔지만 제 답도 힐러리 경만큼 단순합니다. “거기 소설이 있으니까” 읽는 것입니다. 40년 넘게 소설을 읽어오면서 제 자아의 많은 부분이 해체되고 재구성되었겠고, 타인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겠고, 저 자신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만 애초에 그런 목적을 위해 소설을 집어 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 근육량을 늘리고 건강해지기 위해 헬스클럽에 가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인간과 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소설을 읽자’고 결심하는 것은 어딘가 부자연스럽습니다. 소설은 소설이 가진 매력 때문에 다가가게 되는 것이고, 바로 그 매력과 싸우며 읽어나가는 것이고, 바로 그 매력 때문에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독서의 목적 따위는 그에 비하면 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독서의 목적 같은 것으로 설명해버리기에는 소설을 읽으며 독자가 겪는 경험의 깊이와 폭이 너무 넓고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개개의 독자가 특정한 소설을 읽으면서 어떤 변화를 겪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모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소설을 하나의 도구처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소설이라는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다른 책을 읽는다는 것과는 좀 다른 것 같다. 책을 통해 모르던 지식들을 습득하게 되고, 책을 통해 배우고 싶은 것들에 대해 배울 수 있고, 책을 통해 생각하지 못 했던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소설은 지식을 습득하는 것도, 배우고 싶던 것을 배울 수도, 뚜렷한 길을 따라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내가 가볼 수 없는 곳을 가고, 내가 해볼 수 없는 것들을 하고, 내가 상상할 수 없었던 것들을 상상하게 되는 것, 그 자체다. 직접 겪은 것도 아닌데 그 안에서 놀라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것이 소설인 것이다. 그런데 나는 자꾸 그 안에서 다른 책들처럼 지식을, 교훈을, 배움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니 소설을 읽고 난 후 난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어라고 허무감과 무기력함을 느낄 수밖에. 좋은 음악을 들을 때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의 무게에 짓눌려 진정한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느낀 적이 많지 않은 것 같다. 더욱 깊이 빠져 소설을 읽는 것이 가장 기본적이면서 가장 지혜로운 소설 읽기의 방법인 것을 모르고 정답만 찾아내려 했다. 그 소설이 주는 이로움을 따지기 보다 더욱더 깊이 빠져 흥건하게 젖는 것이 먼 훗날 그것을 읽은 나의 내면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인데 말이다.




그러나 독서는 다릅니다. 소설을 읽음으로써 우리가 얻는 것은 고유한 헤맴, 유일무이한 감정적 경험입니다. 이것은 교환이 불가능하고, 그렇기 때문에 가치가 있습니다. 한 편의 소설을 읽으면 하나의 얇은 세계가 우리 내면에 겹쳐집니다. 저는 인간의 내면이란 크레페 케이크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상이라는 무미건조한 세계 위에 독서와 같은 고유한 내면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 책을 통해 소설을 읽는 행위를 좀 더 즐겁고 가볍게 오래토록 할 수 있을 것 같다. 봐도봐도 질리지 않고, 봐도봐도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나의 취미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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