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Inside Wisdom

위험한 영화

영화 <조커>를 보고

by Ann


이 영화는 위험하다. 끝내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고 말 조커를 통해 대리 만족, 해방감을 느끼고 심지어 그를 응원하게 만든다. 영화가 끝나고 이 영화는 위험하고도 무서운 영화라고 생각했다. 와킨 피닉스도 베니스 영화제의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늘 긴장하고 있고 주눅 들어 있는 아서를 연기하다가 조커를 연기하니 너무 자유로웠다고. 보는 사람도 그랬다. 마치 내가 억압해서 벗어나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며 광대 복장을 하고 사람들 앞에서 웃음을 만들어내고 춤을 추기도 하는 아서 플렉은 스탠드 업 코미디언이 꿈이다. 하지만 그에겐 여러 가지 장애물이 있다. 가장 큰 부분이 정신 질환. 웃고 싶지 않은 상황에서 터져버리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다. 심지어 슬플 때까지도. 그것 때문에 동료들과도 어울리지 못하고 바깥세상에서도 섞이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직장 동료가 건넨 총을 가지고 일을 하다가 발각이 되어 직장을 잃게 되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자신을 폭행하던 남자 셋을 갖고 있던 총으로 죽이고 그때부터 아서는 서서히 조커로 변해간다.

시작부터 영화는 침울하다. 아서의 불안정한 일상들을 들여다보게 되는데 가장 많이 드는 감정이 동정심이다. 어떨 땐 멀쩡해 보이지만 어떨 땐 어린아이 같기도 한 그를 보고 있으면 안쓰러웠다. 소년들에게 어두운 골목에서 속절없이 두들겨 맞을 때, 버스 안에서 아이를 즐겁게 해주려고 한 선의를 오해받을 때, 주체할 수 없는 웃음 때문에 목을 움켜쥐고 거친 숨을 내쉴 때,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 어쩔 줄을 모르는 손을 볼 때 애처롭다. 그의 상태는 안타깝고 그의 미래는 답답하다.

초반에 그는 여리고 다정한 모습을 종종 보여준다. 하지만 그 다정함이 다정함으로 돌아오지 않자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잘못한 것이 없는 그에게 돌아오는 것들은 늘 오해와 무시. 폭행을 당해도 힘없이 누워 숨을 헐떡이기만 하던 아서는 사장에게 오해를 받았을 때는 쓰레기 더미를 몸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꽤 오래 걷어찬다. 전에 볼 수 없던 모습이다. 결국 그 분노가 살인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런데 그의 분노와 살인은 와킨 피닉스의 연기 때문에 설득이 된다. 실제로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만 영화니까 마음 놓고 아서를 응원하게 되고 이해하게 된다. 와킨 피닉스의 온몸이 그것을 이끌어낸다. 앙상한 등과 발목, 굽어진 어깨, 움푹 팬 눈, 힘없는 발걸음이. 빼앗긴 피켓을 되찾기 위해 크고 무거운 광대 신발을 신고 전력질주하는 아서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와킨 피닉스는 평소에도 그렇게 뛰는 것일까? 그저 전력질주하는 장면인데 어딘가 처연하다. 작은 생명체가 살아보고자 애써 움직이는 것처럼.

그의 아서에서 조커로서의 완벽한 변신 때문에 자꾸 조커가 보고 싶어진다. 매번 당하기만 하고, 맥없이 쓰러지던, 슬픔을 참아내려, 분노를 참아내려 웃을 수밖에 없던 아서가 조커로 변했을 때 사실 대리 만족을 느꼈다. 늘 우울했던, 어두웠던 그의 삶에 빛이 드리워진 것 같았다. 그가 오해를 받고 직장에서 해고당해 짐을 챙겨 나갈 때 문밖에서 비추던 빛, 그에게 머레이 쇼 스텝으로부터 온 섭외 전화를 받을 때 창문으로 들어왔던 빛, 조커로 변신하기 위해 준비하던 중 춤을 출 때 창문으로 들어온 빛, 어머니를 살해한 후 병실 창문으로 비춰들어온 빛, 영화의 엔딩에서 보호소 복도까지 환하게 밝히던 복도 끝 문으로 들어온 빛 등이 그걸 말해주는 것 아니었을까. 비록 조커는 사람을 죽인 악마지만 그에겐 그것이 구원이었던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으로 아서에게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조커로 변신한 그가 탄 엘레베이터 문이 닫힐 때 그 사이로 보이던 그의 자신만만한 미소 띤 얼굴, 늘 힘겹게 오르던 계단을 춤을 추며 내려오던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전율했다. 나와 조커에게만 들리는 음악에 맞춰 조커는 매력적으로 춤을 췄고 나는 매혹당했다. 두고두고 몇 번씩 보고 싶은 장면이다. 뒤따라오던 경찰들을 따돌리고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걸음걸이로 미소를 띤 채 담배를 피우며 카메라를 향해 걸어올 때 나는 확신했다. 이보다 더 매력적인 조커는 없다고. 현재까지는.

그늘 가득한 얼굴의 아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여유 넘치고 기세 등등한, 매력적인 조커만 있을 뿐이다. 이 영화는 그가 살인마라는 사실만 뺀다면 한 사람이 완벽하게 자유로워지기까지의 과정으로 볼 수가 있다. 자신을 어디서든 주눅 들게 만들었던 정신적인 질환에서, 모두가 자신을 무시하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아서의 이야기로 말이다. 그 계기가 살인이라는 것이 이 영화를 위험하다고 느끼게 한다. 그에겐 살인이지만 나에겐 ‘책이고 글’이었다. 잔뜩 웅크린 나를 조금씩 조금씩 자유롭게 만들어준 것은. 종종 열등감에 얼굴을 붉히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노력하며 살던 나를 고개 들게 만든 것, 힘차게 걸어나갈 수 있도록 만든 건 책과 글쓰기였다.

아서에게는 살인이 나에게는 책과 글이 해방의 도구였던 셈인데 우리는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만약 아서가 평범한 엄마를 만났다면, 꾸준히 정신과 상담을 받고 약을 처방받을 수 있었다면, 터무니없이 오해를 받고 무시당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아서에게도 그 도구가 살인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이 그를 조금 더 배려했다면, 그의 상황에 공감했다면 말이다.

내가 아닌 어떤 이들에게도 이 영화는 큰 대리만족, 해방감을 주었을지 모른다. 누군가로부터 학대 당하고, 오해받고, 배제되고, 무시당해온 사람들. 그들에게 이 영화는 응원의 메세지가 될 수도 있다. 그 점이 좀 무서웠다. 책과 글, 그 외에 다른 것들이 아니라 누군가를 해하는 것으로 만족감, 해방감을 느끼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가 어떻게 보일지.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감독의 말은 와킨 피닉스의 연기가 덮어버린다. 와킨 피닉스는 아서를 영화 속 캐릭터가 아닌 실제로 만들어버렸다. 끝까지 그가 와킨 피닉스라는 걸 알지 못하게끔 연기를 해버렸다.

조커는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절대적 악마가 아니라는 것을 이 영화를 보면서 느끼게 된다. 또 다른 조커를 탄생시키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처럼 보일 수도 있는 영화다. 조커는 너무도 매력적이지만 그건 영화 안에 갇힌 조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우리 사회에서 마주칠 수 있는 조커는 결코 매력적이지 않다. 무자비한, 짐승 같은 살인자일 뿐이다. 어쩌면 그런 조커는 우리 사회가 만들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나는 어떤 가을을 맞이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