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 스미스 “가을”을 읽고
아, 안녕. 그가 말한다. 너다 싶었다. 좋다. 만나서 반갑구나. 뭘 읽고 있니?
대니얼은 엘리자베스를 만나면 인사로 자주 묻는다. “뭘 읽고 있니?” 나는 그의 이 인사가, 질문이 좋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좋았다. 이런 친구가, 어른이 내 곁에 있었다면 나는 또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 나도 이런 어른이, 친구가 되고 싶다. 하는 생각을 했다.
무엇을 읽고 있는 사람, 무엇을 읽고 있냐고 묻는 사람, 그리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나도, 상대방도. 나보다 조금 더 앞서나가는 사람이라면 더욱 좋을 것 같다. 하지만 그걸 결코 티 내지 않는 사람이 진짜다. 대니얼처럼.
이 소설은 생각보다 빨리 읽었다. 읽히기는 빨리 읽히는데 생각은 더디게 따라온다. 시 같다고나 할까. 어떤 부분은 가까운 과거의 이야기이자 현재의 이야기여서 금방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는데 어떤 부분은 꿈 이야기와 같아서 이 장면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한참을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그 장면을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가더라도 대니얼과 엘리자베스의 관계는 흥미롭다. 할아버지와 소녀의 우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엘리자베스는 호모라고 소문이 난 혼자 사는 노인 대니얼에게 유일한 친구가 되어준다. 엘리자베스의 엄마는 그와 어울리지 말라고 얘기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찾아가 시간을 보낸다. 그 시간동안 그녀는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는다. 인생 전체에.
대니얼은 결코 그녀를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그저 묻는다. “어떻게 생각하니?”, “너에게는, 네 상상력에는 어떤 영향을 주던?”. 그리고 그녀의 대답을 듣고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받고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건네는 식으로. 두 사람은 나이 차이와, 경험의 차이와 상관없이 깊은 대화를 나눈다.
대니얼이 그런 사람이었기에, 엘리자베스에게 그런 존재였기에 그녀는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키게 됐을 것이다. 죽음과 점점 가까워지는, 요양원에 있는 대니얼에게 주기적으로 책을 들고 찾아간다. 그의 곁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온다. 계속 꿈속에서 헤매는 그의 곁에서 온기를 보태주고 돌아온다. 기꺼이 그렇게 한다.
대니얼의 마지막은 외롭지 않다. 꿈속에서 모험을 하고, 동생을 만나고, 곁에는 엘리자베스가 있으니까. 그의 자는 모습을, 그가 삶에서 멀어져 가는 모습을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곁을 지켜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이해해주고 마음을 나눴던 사람이 곁에 있으니까.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엘리자베스가 아니라 대니얼에 자꾸 이입을 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 내가 그처럼 요양원 침대에 누워 삶보다는 죽음에 더 가까워지고 있을 때를 상상하게 되고, 내 나이가 대니얼의 나이쯤 됐을 때 나의 주변을 상상하게 된다. 엘리자베스의 현재가 아니라 대니얼의 현재에 나를 대입시키게 된다.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모르기 때문일까.
대니얼은 인생의 계절 중 가을을 지나 겨울로 가고 있는 중이다. 그의 가을을 통해 나의 미래를 상상해본다. 그리고 어떤 인간으로 늙어갈지 생각해본다. 나의 가을은 어떨지, 어떤 가을을 맞이할지에 대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