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를 읽고
수많은 범죄들 중에서 피해자가 손가락질 받거나 의심받는 범죄는 성폭력이다. 나 또한 어릴 땐 그랬다. 지나가다가 자신의 아랫도리를 다 드러낸 변태를 보고 너무 놀라 식은땀을 흘린 일이 있어도 가족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왠지 숨겨야 할 것 같았다. 쉬쉬해야 하는 일이라고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그 시절에 누군가가 나에게 성추행, 성폭행에 대해 제대로 알려줬더라면, 그런 일이 결코 숨길 일이, 내가 부끄러울 일이 아니라고 말해줬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의 삶에서도 그렇게 위축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꽤 오래전부터 여성과 성의 관계는 부정적인 하나의 묶음이었다. 그게 설령 피해자의 신분이라고 하더라도. 그 인식이 나도 최근에 바뀌었다. 서지현 검사가 큰 역할을 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미투 사건들을 접하면서 내 인식도 달라졌다. 숨길 일이 아니다, 당당해도 된다, 내 잘못이 아니다, 나에게 저런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면 결코 숨기지 않을 것이다,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 하는 생각들이 새로 내 안에 자리 잡았다.
그때부터 여러 발언들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러게, 처신을 똑바로 했어야지.”, “밤늦게 왜 돌아다녀.”, “술을 그렇게 마시면 어떻게 해.” . “거긴 왜 따라들어가.”, “당한 사람이 어쩜 저렇게 멀쩡해.” 등등. 나도 그렇게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남자들이 어떤 동물들인데 조심했어야지. 나 또한 늘 불안에 떨며, 조심하며 돌아다녔다. 택시 타는 게 무서워서 무조건 버스 끊기기 전에 집으로 돌아갔고, 술은 아주 친한 사람들하고 있을 때, 집 근처에 있을 때만 마음껏 마셨다. 밝은 곳으로만 다녔고, 노출이 심한 옷은 내 취향이 아니기도 했지만 걱정스러운 마음에 잘 입지 않았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나를 단속하며 자유롭지 못하게 살았다. 그럴 일이 아니었는데. 내가 그렇게 조심스럽게 산다고 그런 일이 안 벌어지고, 자유롭게 산다고 벌어지는, 그런 일이 아니었는데.
피해자의 태도에 대해서도 한참 잘못 생각하며 살았다. 피해자라면 늘 눈물에 젖어,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있는 것이 내게는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래서 내가 영화 <엘르>를 보았을 때 큰 충격에 휩싸인 것이다. 아, 저럴 수도 있는 거다. 정해져 있는 피해자의 모습이란 없다!
영화 <엘르>의 초반부에 주인공 미셸(이자벨 위페르)이 갑자기 들이닥친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그다음 진행 상황이 충격적이다. 미셸은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해나간다. 병원에 가고 출근을 한다. 누가 이 사람을 보고 아침에 성폭행 당한 여성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을까. 그녀는 누구보다 차분하고 치밀하게 복수를 준비한다. 이럴 수도 있는 것이다. 침착하다고 해서 피해 입지 않은 것이 아니다. 사람에 따라 받은 충격의 정도가 다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다. 피해자는 피해자다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기준에서 벗어나면 의심하기 시작한다. 범죄를 밝혀내고, 범죄자를 벌할 생각보다 피해자를 의심하는 데 더 큰 힘을 소모한다.
그것에 대해 깊게 파고든 책 한 권이 있다. 켄 암스트롱, T. 크리스천 밀러의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 제목 그대로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던 강간 사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의 저자, 두 사람이 그 사건에 대해 깊게 취재한 내용이 이 책에 실려있다.
2008년 여름, 시애틀에서 18세 마리가 강간을 당했다고 신고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마리는 며칠 후 허위 신고였다고 고백한다. 그녀의 이야기는 과연 진실일까.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것처럼 흥미롭게 읽힌다. 그런데 이것이 실화라는 것을 떠올리면 답답해진다. 피해자 주변 사람들, 심지어 경찰들까지도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이런 질문이 가당키나 한가?
“너 강간 당한 거 맞니?”
강간을 당했다고 신고한 어린 소녀에게 이런 질문을 했어야만 했는가. 마리는 이 질문을 듣고 흔들렸다. 자신이 정말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했다. 엄청난 일을 당한 그녀였기에 모든 기억, 생각들이 뒤엉켰다. 결국 가장 가까운 사람까지 자신을 의심하자 자신이 거짓말을 한 것 같다고 털어놓는다. 이야기는 과거인 마리 이야기에서 점프해 2011년으로 온다. 2011년 1월 5일 콜로라도주에서 앰버라는 여성이 강간을 당했다. 그녀의 사건을 맡은 담당 형사가 등장한다. 스테이시 갤브레이스라는 여자 형사다. 이 책에서 주인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녀의 끈질긴 의지가 있었기에 아무도 믿지 않았던 강간 사건을, 연쇄 강간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비롯한 그녀와 함께 활약해준 그 분야의 여성들이 큰 힘을 발휘했다. 허위 신고로 오히려 고발 당한 피해자를 구원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성폭력을 바라보는, 대하는 여러 가지 시선과 태도가 얼마나 잘못 되었는지, 그것이 얼마나 더 큰 희생을 불러오는지를 보여준다. 형사와 검사는 피해자에게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해 누차 확인을 하고, 다그친다. 피해자는 같은 설명을 수도 없이 반복해야 한다. 자신의 기억이 헷갈릴 때마다 커지는 의심에 짓눌려야 한다. 자신이 진짜 강간 당했음을 비참하지만 가장 적극적으로 밝혀내야 한다. 당당해서는 안 된다. 그 태도조차도 오해와 의심을 불러일으키니까.
그 과정들을 지켜보면서 어쩌면 피해자들은 강간을 당한 후 더 큰 2차적인 피해를 입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인데 오히려 상처가 덧나고 있었다. 그 시간 동안 범죄자는 다른 먹잇감을 찾아다니고 있었고 누군가는 희생되고 있었다. 이 얼마나 한심한 짓인지. 이 책은 그런 문제점들을 콕 집어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그랬듯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 성폭력은 결코 피해자의 잘못으로 벌어지는 범죄가 아니라는 것을. 또 피해자가 취해야 할 행동들이 공식처럼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상황에 따라, 성격에 따라 경험에 따라 반응은 천차만별일 수 있다. 그런데 잘 모르는 사람들은 말한다. 소리를 지르지 왜 안 질렀지? , 더 거칠게 저항을 했어야지, 싫다고 말했어야지.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종류의 사건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참 쉽게도 말하고 생각한다. 그것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않고 말이다.
이 책은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허위 신고로 범죄자가 될 뻔했던 마리와 같은 희생자가 더 이상은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한 반성과 결심에 대한 기록이다. 한국의 모든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기관의 사람들이 특히 이 책을 꼭 읽어보길 바란다. 적어도 그 사람들만큼은.
북크러쉬 <지혜의서재>에서 책 자세히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