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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 Nov 04. 2019

내가 선택하지 않은 나의 삶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이 영화를 보고 울었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결혼하지 않은 동생도 이 영화를 보고 울었다고 했다. 과연 나도 그럴까? 소설을 읽었을 때 눈물이 나기보다는 화가 났는데, 과연 영화를 보고 울까? 궁금했다.

울었다. 영화는 나를 울렸다. 이것이 소설과 영화의 차이일까? 영화는 나의 오감을 자극했다. 지영을 비추는 장면들은 거의 대부분 노동의 모습이다. 아이를 안고, 달래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화장실 청소를 하고, 청소기를 밀고. 그 모습을, 계속 반복되는 그 노동을 보고 있자니 내가 지쳤다. 해도 해도 티가 안 나는 노동, 나에게 큰 의미도 성취감도 없는 노동.

육체적인 노동뿐만 아니라 그녀의 정신적인 노동이 나를 더욱 지치게 했다. 핏기 없는, 생기 없는 지영의 얼굴이 그녀의 정신 상태를 알려주고 있었다. 살아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무서웠다. 그녀의 모든 것은 내가 선택하지 않은 나의 미래였다. 내가 만약 과거의 그 시점에 그 선택을 했다면 지영이 아니라 내가 헛소리를 해대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착하다’라는 소리를 많이 들으며 자랐다. 사춘기 시절엔 반항아 흉내도 내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에게 난 착한 큰 딸이었다. 친구들도 나를 착하다고 했고, 긍정적이라고 했다. 선생님들도 나를 착한 학생이라고 했다. 예의가 바르고 차분하고 여성스러운 아이라고 평가했다. 아빠에게도 고분고분한 딸이었고, 남자 친구들에게도 순종적인 여자친구였다. 모두가 기대하는 반응을 기계적으로 뽑아냈고, 모두가 불편해하는 상황은 만들지 않았다. 그 상태 그대로 나는 나이를 먹었다. 친구들이 하나둘씩 결혼을 했고 그 친구들과 약속을 잡을 때 내가 한 걱정은 “남편 저녁은?” 혹은 “아기는?”이었다. 나이는 어렸지만 생각은 지영의 할머니 시대에서 멈춰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이 불과 10년 밖에 되지 않는다. 그 사이에 나는 변했다.

만약 내가 이렇게 변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그 시기에 덜컥 결혼을 했다면 난 아마 99% 김지영과 일치하는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삶,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은 계속 나를 두드리는데 못 본 척 외면하려고 노력하며, 나만 희생하면 모든 것이 안정적이고 평화롭게 흘러갈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다독이며 조금씩 조금씩 망가져갔을 것이다.

지영이 다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붙잡았을 때 전 직장 동료가 묻는다. 할 수 있냐고. 그때 지영은 대답한다. 되게 해야지. 맞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정말 간절하게 그 일을 원한다면 일단 시작을 하고 나머지를 조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끝도 없이 밀리고 밀려 나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지영이 말한 대로 하길 바랐다. 그녀의 간절함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길 바랐다. 하지만 시어머니의 호통 한 번에 그녀는 나가떨어졌다. 포기해버렸다. 바보 같다고? 스스로가 기회를 발로 차 버린 거라고? 그렇게 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남편도 육아휴직을 낸다고 했는데 왜 그렇게 쉽게 나약하게 포기하냐고. 하지만 나는 안다. 그녀는 이미 그렇게 길들여진 사람이라는걸. 내것이 먼저라기 보다, 그것을 챙기다가 갈등을 겪는 것보다 내것을 포기하는 것이 더 쉬운 사람이라는걸. 모두와 갈등을 겪으며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걸. 그렇게 키워져온 사람이라는걸.

내가 결혼 생활을 했다면 지영과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시어머니의 호통에 심장이 떨리고, 나 때문에 승진에 밀릴 수도 있는 남편의 입장이 불편하고 끝내 베이비 시터도 구해지지 않는 상황에 조바심이 나고. 나 때문에 불편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네, 어쩌지, 어쩌지...... 지영의 말대로 혼자 전쟁을 치르다 포기했을 것이다. 그리고 잠깐이나마 차올랐던 설렘을 어쩌지 못한 채 무너져 갔을 것이다. 어쩌면 울고 있는 아이를 붙들고 울면서 시간들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니 섬뜩했다. 결혼할 나이니까, 곁에 누가 있으니까 썩 내키지 않더라도 덜컥 그때 내가 결혼을 해버렸다면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라 저 영화 속 지영으로 살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단지 아이를 키우고 집안일을 하며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하지 못하고, 부당해도 부당하다고 말하지 못하고, 함께 해야 할 일에 대해 함께 하자고 말하지 못하고,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하고 싶다고 말하지 못하고, 하고 싶은 일을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나에게 책을 읽는 시간, 글을 쓰는 시간, 배우는 시간들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알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 하는 생각들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끝내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 삶을 끌려가듯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견디지 못해 언젠가 와르르 무너져버렸을 것이다. 그러다 결국 투명 인간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조금 다를 수 있을 것 같다. 적어도 나의 희생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좋은 선택을 하려고, 무리하지 않는 선을 잘 지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잘 구분할 것이고 힘이 들면 힘이 든다고 얘기할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할 수 있도록 방법을 찾을 것이고 방법을 찾기가 어렵다면 도움을 청할 것이다. 그 결과 이기적이라는 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써놓고 보니 이 당연한 걸 왜 못 하며 살았을까 싶다.

내 눈물이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온 부분은 지영은 끝내 아영이를 돌봐줄 베이비 시터를 구하지 못해 복귀를 포기하고, 지영의 엄마는 지영의 병을 알게 되어 그녀를 찾아와 손을 꼭 잡고 “엄마가 도와줄게, 엄마가 가까운 곳으로 와서 아영이 봐줄 테니까 일해.”라고 얘기하는 장면이었다. 남편 대현에겐 당연한 직장 생활이 지영과 지영 엄마에겐 그렇게 손을 꼭 잡고 울며 결의를 다져야 하는 일이라는 게 슬프기도 했고 다시 복귀할 생각에 한동안 환했던, 하지만 다시 그 빛을 잃은 지영의 얼굴 때문에 눈물이 났다. 또 힘든 시간들을 보내온 엄마에게는 죽어도 아영이를 부탁하기 싫었던 지영의 마음을 알기에 둘 다 너무 안쓰러웠다. 이때 아빠는 그 고민 속에, 그 눈물 속에, 그 연대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엄마 만이 딸의 심정을 알고, 딸 만이 엄마의 심정을 알아 눈물을 흘린다.

영화는 지영이 뭔가 다시 시작하는 장면에서 끝이 나는데 나에겐 그다지 희망적인 엔딩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왜 하필 집에서 끝이 날까. 끝내 집을 벗어나지 못한, 새장을 벗어나지 못한 새처럼 느껴져 답답했다. 지영이 정신과 상담을 할 때 종종 어딘가에 갇혀 있는 것처럼 느낀다고 얘기한다. 벽을 지나면 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또 다른 벽이라고. 그런 그녀가 어딘가로 나가길 바랐다. 탈출하길 바랐다. 하지만 돌고 돌아 결국 그녀가 앉아 있는 곳은 집이었다. 현실적이긴 하지만 나는 좀 아쉬웠다.

언젠가, 조금은 빠른 시간 내에 이 영화가 우습게 느껴지길 바란다. 이 영화를 보고 울지 않을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나의 조카들이 이 영화는 말도 안 된다고 얘기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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