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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 Nov 07. 2019

이 책을 읽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

김한민, <아무튼, 비건>을 읽고


나를 정의할 수 있는 수많은 단어 중에 하나가 “육식주의자”이다. 내 나이 3살 때 지혜는 무슨 음식을 제일 좋아해?라고 물으면 “밥, 김치, 고기”라고 답했다. 희한하게 그건 기억이 난다. 아마도 어른들이 내가 다 큰 후에도 계속 그 이야기를 해줘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너는 밥, 고기, 김치만 있으면 잘 먹었어,라고.



그 식성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고기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음식 중에 제육볶음이 꼭 껴 있고, 만두도 김치만두보다는 고기만두를 좋아한다. 아니면 고기도 들어간 김치만두. 고기반찬이 있어야 맛있게 식사를 했다. 물론 고기반찬이 없어도 잘 먹는다. 하지만 바란다. 고기반찬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더 말하기도 입 아프다. 완벽한 육식주의자의 삶.



그런 내가 아주 잠시나마, 찰나의 순간이나마 채식주의자를 꿈꿨던 적이 있었다. 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난 후였다. 2012년 SBS에서 방영했던 다큐멘터리, <동물, 행복의 조건>이라는 다큐멘터리였는데 보고 난 후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공중파 다큐멘터리라 많은 것들이 생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눈뜨고 차마 볼 수 없는 장면들이 가득했다. 사람들에게 먹히기 위해 키워지는 동물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무조건 앞만 볼 수 있는 돼지우리, 내던져지는 병아리, 죽는 순간까지 죽지 못하는 소.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었다.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그 다큐멘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았다. 그렇게 키워지고 죽은 동물을 먹는 인간도 결코 건강할 수 없다는 경고도 담겨있었다.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한동안은 고기를 떠올리면 속이 울렁거렸다. 고기가 먹고 싶다는 생각은커녕 거부 반응이 생긴 것이다. 아, 이대로 채식주의자가 되어볼까 싶었다. 그땐 내가 아는 채식주의자는 가수 이효리밖에 없었다. 그녀가 이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을 맡기도 했다. 내가 생각하는 채식주의는 이효리처럼 저렇게 야만적인 방법으로, 고통과 함께 키워진 동물들을 먹지 않는 것이었다.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저 동물들의 고통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어!



그리고 일주일 후 나는 제육볶음 덮밥을 먹었다. 일주일 만에 몸의 거부 반응은 사라졌다. 그 이후로 고기를 먹는 육식주의자의 삶은 또다시 이어져왔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다. 죄책감이 생겼다는 것이다.



맛있게 먹고, 자제하지도 않았지만 먹을 때마다 단 한 번도 죄책감이 안 든 적은 없었다. 찜찜했다. 아...이걸 어떻게 안 먹고살지, 괴롭다. 안 먹고 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리고 여러 번 혼자 다짐했다 포기하기를 반복했다. 자꾸만 마음이 불편하니까. 하지만 고기를 먹지 않을 만큼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 이후로 동물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까. 그때 그 기억은 이미 흐려질 대로 흐려졌으니까. 나의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래, 동물 복지에 신경 쓰는 업체의 고기만 먹자, 그러면 되잖아. 인도적인 방법으로 죽이는 곳의 고기만 먹자. 이것이 나의 끔찍한 타협안이었다.



그러다 친구가 신청한 지혜의서재 때문에 김한민 작가의 <아무튼, 비건>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건강한 삶, 인생에 대한 책을 추천해달라는 친구의 말에 이 책을 한 번 읽어볼까 한 것이다. ‘비건’이라는 단어는 건강이라는 단어와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었다. 희한하게도, 우연히도 이 책은 ‘연결’이라는 단어로 시작되었다. 나와 동물, 나와 자연의 연결. 나에겐 이미 끊어져있던, 내가 끊어버렸던 그 연결에 대해 이야기하며 시작되었다.



이 책은 건강한 삶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아니었다. 나는 이 책에 흠씬, 엄청나게, 무자비하게 두들겨맞았다. 혼쭐도 이런 혼쭐이 없었다. 아팠다. 너무 아팠다. 맞으면서 생각했다. 난 맞아도 싼 사람이네. 이 고통이 동물들의 고통에 비할까......



책을 읽다가 <도미니언>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무시무시한 경고가 있었지만 나에게 주는 벌이었다. 시작하자마자 나는 꺼버렸다. 손이 떨려서 더는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시 켠 이유는 동물들에겐 너무 미안하지만 이런 충격이 필요했다. 평생 이어져 온 식습관을 바꾸려면 어마어마한 충격이 필요했다. 동영상 시간을 확인해보니 2시간. 2시간 동안 나는 고통을 받아야 했다. 보다가, 끊고, 보다가 끊고를 반복하며 봤다. 너무 끔찍한 장면은 건너뛰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보았다. 2시간을 채우지는 못했지만 손을 벌벌 떨며 눈물을 쏟아내며 다 보았다.



<아무튼, 비건>을 읽고 <도미니언>을 보고 그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7년 전 다큐멘터리를 보고 미미하게나마 내가 달라졌듯 이 책을 읽고, 이 영상을 보고 다시 돌아가지는 못할 것 같다고 느꼈다. 7년 전엔 그저 동물들이 처한 상황이 불쌍했고, 그런 환경에서 자란 동물을 먹는 건 인간에게도 좋을 것이 없다는 정도에서 그쳤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알게 되었다. 동물은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 사람의 먹잇감이 되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 아니라는 것, 육식에 대한 많은 정보들이 잘못됐다는 것, 동물 복지가 잘 되어 있는 농장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 등등. 내 마음 편하자고 내 마음대로 짜깁기했던 정보들이 다 가짜였다.



작가는 계속 나에게 묻는다. 소가 인간에게 우유를 만들어주기 위해 이러이러한 고통을 당하는데 그래도 먹을래? 달걀이 만들어지기 위해 병아리가 이러이러한 고통을 당하는데 그래도 먹을래? 돼지가, 닭이, 소가...... 그래도 먹겠다고 한다면 할 말을 잃고 그 사람의 얼굴만 무력하게 쳐다봐야 할 것 같다고 말한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혼란스러웠다. 모든 것을 되돌아봤다. 내가 육식을 좋아하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먹는 양은 사실 많지 않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서 고기를 사 먹을 기회가 없고 집에서는 더더욱 고기를 먹지 않는다. 엄마가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하시기 때문에 덩달아 나도 그렇게 먹는다. 그럼 채식을 한다고 해도 그렇게 힘이 들진 않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을 했다가도 사람들을 만날 땐 어쩌지, 친구들은 다 고기를 좋아하는데 앞으로 나와의 만남을 꺼리지는 않을까, 그렇게 멀어지지는 않을까. 나의 의지력에도 의심이 들었다. 평생 이어져온 습관을 내가 이겨낼 수 있을까. 복잡해졌다. 머리와 마음이.



시작되었다. 나와의 싸움이. 변화가. 지금도 고통받고 있는 동물들을 생각하면서도 당장 결정하지 못하는 내가 싫지만,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브레이크가 생긴 것만은 분명하다. 앞으로 더 많은 책과 영상으로 나를 변화시키려 한다. 이 글이 출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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