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겨울왕국 2>를 보고
엘사는 손을 꽁꽁 감싸고 있는 장갑을 벗어던지며 이제 그만 자신을 내버려 두라고 소리쳤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찾은 것 같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왕의 자리에 오른 그녀가 안나, 울라프와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두 손을 어쩌지 못해 불안해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어쩌면 장점일 수 있는 그 힘을 숨기며 살고 있었다. 겨울왕국 2는 그런 엘사가 자신의 힘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자기 자신 그대로가 자연스러울 수 있는 곳을 찾아 용기를 얻게 되는 이야기이다.
엘사는 불편하고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벗어던지고 달리고 또 달린다. 그녀가 가진 힘을 십분 활용해 바다의 거친 파도에 맞서 가고자 하는 곳으로 내달린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만약 엘사가 도중에 포기를 했다면 어땠을까. 찾지 못했겠지. 진실도, 힘도, 그녀 자신이 있어야 할 곳도.
내가 만약 글쓰기를 포기했다면, 책 읽기를 포기했다면, 나로 살기를 포기했다면 지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지혜의서재>가, <잠 못 이룬 그대에게>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로 인해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내게 준 모든 것들을 잃었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슬프다.
어릴 땐 나의 꿈에 대해 쉽게 이야기하지 못했다. 작가라는 꿈은 뒤에 숨겨둔 채 누구나 알만한, 꿈꿀 만한 선생님이란 장래희망을 써내곤 했다. 나의 작은 수첩에만 연필로 라디오 DJ가 되고 싶다고 썼다. 혼자 조용히 끄적이는 날들이 많았다. 다이어리는 나의 필수품이었다. 나의 글들은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고 다이어리 속에 꽁꽁 숨겨져 있었다. 점수에 맞춰 무난한 학과를 골라 대학을 갔다. 좋아하는 걸 너무 깊은 곳에 숨겨버린 탓에 나중에 찾으려니 찾을 수가 없었다. 누가 숨기라고 한 건 아니었지만 그땐 또래 친구들과 다른 것이 싫었다.
내가 숨겨두고 찾지를 못하는 동안에도 나는 글을 썼고, 책을 읽었다. 그땐 몰랐다. 숨겼어도 다 흘러나오고 있었다는 것을. 어느 날, 잘 알지 못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블로그에 글을 쓴다고 머뭇거리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평소 그런 말을 친한 사람에게도 잘 안 하는데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거기까지 흘러가고 만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듣더니 그는 그건 오덕후들이나 하는 거 아니냐고 가볍게 농담처럼 받아쳤다. 그렇구나, 보통 사람들은 작가가 아닌 이상 혼자 글을 쓴다고 하면 오덕후로 보는구나. 다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또 어떤 사람은 네가 맨날 혼자 그렇게 책 보고 글을 쓰니까 점점 이상해지는 거라고 했다. 성폭행을 저지른 남자 가수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논쟁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내가 남녀 편을 가른다며 그런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가 왜 그렇게 결론이 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앞으로 이 사람과 깊은 대화는 나눌 수 없겠다는 사실 만은 알 수 있었다. 점점 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 조심스러워졌다. 나의 주장은 유별난 사람의 유별난 생각으로 여겨지곤 했으니까. 점점 더 말수가 적어졌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도 입을 닫았고 대신 글에 쏟아냈다.
내가 글을 발행하고 있는 곳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공감해줬다. 나는 현실 속의 사람들보다 나의 글 주변에 모여 있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이들이 훨씬 편했다. 글 속엔 내가 자연스럽게 담겼고, 그들에게 나의 글을 보여줬다. 꽤 오랜 시간을 두 개의 세상에서 살았다. 손을 꽁꽁 싸맨 엘사처럼. 현실이 아닌 곳으로 숨어서 다른 나로 활동했다.
하지만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 나를 자꾸 불렀고 이끌었다.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며 들려오는, 나를 이끄는 그 소리를 무시하려 했지만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끝까지 그 소리의 근원지를 쫓았다. 내가 숨겨놓은 것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 끝내 나는 그 목소리를 따라 달렸고 지금 여기에 있다. 두 개의 세상은 하나의 세상이 되었다.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책을 팔고, 목소리를 퍼트리며 사는 하나의 세상. 내가 나인 세상.
나의 목소리, 나를 찾는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읽고 쓸 수 있게 된 지금의 삶이 얼마나 충만한지. 내가 끝까지 목소리를 향해 달릴 수 있었던 건 나를 지지해준 사람들의 마음의 힘이 크다. 엘사가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도 안나, 울라프, 부모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 걱정하면서도 끝까지 믿어주는 마음이 결국 엘사를 진짜 엘사가 될 수 있게 해주었다. 나 또한 중간에 포기했다가도 다시 시도해볼 수 있었던 건 잘할 수 있다는, 잘하고 있다는 말 한마디, 마음 하나하나 덕분이다.
글쓰기 수업, 독서 모임, 작은 규모지만 자신 만의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 곁에서 나는 편안했다. 나를 나로 둬도 편안했고, 오히려 더욱 적극적인 사람이 되어갔다. 그들에게 힘을 얻어, 그곳에서 충전이 된 나는 바깥세상으로 나와도 당당하게 나를 드러낼 수 있었다. 여전히 조금씩 나를 더 드러내고 있는 중이다. 나를 이끄는 목소리에 충실하고 나를 응원해주는 이들의 마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나는 점점 더 나를 마음껏 드러내며 살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