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천문>을 보고
그 순간 나의 얼굴을 내가 볼 수는 없었지만 내 눈이 빛나고 있음을 느꼈다. 몸에 열기가 느껴지고 손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들뜬 것이었다. 즐거웠던 것이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 앞에서. 더 오래,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런 나의 모습을 <천문>의 장영실과 세종대왕에게서 보았다.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유독 반짝거리고 있는 것처럼 느낀 것은 내가 그랬던 것과 같은 이유였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과 함께 이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에게서 발견해주었다. 진정 이루고자 하는 것들을, 원하는 것들을. 그리고 마음껏 이야기 나눌 수 있었다. 그것이 이상하다고, 무모하다고, 말도 안 된다고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지지해주고 끌어당겨주었다. 어찌 눈이 반짝거리지 않을 수 있을까. 서로를 보며.
나를 알아주는, 내가 좋아하는 것 혹은 원하는 것을 알아봐 주는 사람과 함께 나누는 대화는 시간을 삼킨다. 순식간에 사라진다. 반면 이야깃거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계속 흘러나온다. 내일, 또 내일을 약속하게 만든다. 이런 관계, 감정은 무척이나 소중하다. 쉽게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영실과 세종의 관계는 더욱 소중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과 땅만큼의 신분 차이를 극복해야 했기 때문이다. 시대적 상황, 신하들의 만류, 주변 동료들의 무시 등등 장애물들을 넘고 또 넘어 겨우 그들은 나란히 앉아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들이 좋아하는 별들을 올려다볼 수 있었다. 별이 가득 찬 하늘 아래 나란히 누운 영실과 세종을 보면서 안타까웠다. 하늘 아래 높고 낮음은 정말 부질없는데, 그 아래 우리 인간들의 존재는 어차피 모두 가장 낮은 곳에 있는데, 어차피 다 똑같은데...... 그들이 함께 있을 때 빛나는 눈, 누구보다 순수해 보이는 미소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현실에서도 그런 관계는 흔치 않은데 나는 굉장히 운이 좋은 사람인지 인생의 곳곳에서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들을 만났다. 내가 뭘 해도 웃으며 손뼉 쳐준 엄마, 아빠, 초등학교 때 나의 글솜씨를 칭찬해 준 선생님, 대학교 때 나의 목소리에 대해 얘기해준 아빠의 지인, 나의 문체가 마음에 든다고 슬쩍 이야기해준 친구, 나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어주는 사람들 등등. 불쑥불쑥 나타나 나조차도 모르고 있는 나를 발견해준 이들이 있었다. 그들이 지금의 나를 반이상은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들보다 잘나진 않았지만 나 나름대로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도움이 크다. 그들에겐 가벼운 한 마디였을지 모르겠지만 분명 그 안에는 나에 대한 관심, 애정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 관심과 애정은 한 사람을 잘 키워낸다.
영실과 세종을 지금의 장영실과 세종대왕으로 만든 것은 서로의 힘이 컸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서로가 나눈 이야기, 에너지가 각각 가지고 있는 것들을 더욱 키우고 발전시켰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 오래가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그들에게나 우리 후손들에게나 더욱 큰 힘이 되어줬을 텐데.
살면서 나는 상대에게 ‘그건 안 될 것 같아.’라고 말해본 적이 별로 없다. 대부분 나는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무책임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응원의 힘을 믿는다. 설사 잘 안 될 수도 있었던 일이 응원에 힘입어 잘 될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자꾸 등 뒤에서 밀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잘 될지 안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기도 하고. 성공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읽고 있으면 공통된 이야기 하나가 보인다. 계획대로 된 일이 아니라는 것. 하고자 하는 일을 밀고 나가다 보니 거기까지 가 있게 되었다는 것.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것이 될 일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다. 그저 잘 되도록 응원해줄 뿐이다.
이 세상에 영실과 세종 같은 관계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런 관계가 흔해졌으면 좋겠다. 서로의 진면목을 발견해주며, 응원해주며, 함께 커가는 관계가 많아지면 좋겠다. 우리에겐 눈치를 봐야 하는 명나라도 없고, 사사건건 태클을 거는 신하도 없고, 뛰어넘어야 하는 신분 차이도 없으니까. 그저 이야기를 들어줄 귀와 진심만 있으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