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Inside Wisdom

사랑에 관하여.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를 읽고.

by Ann


x9788937483059.jpg 황정은 - 백의 그림자





힘들다. 은교와 무제의 삶은 힘들다. 하지만 그 안에서 그들은 행복하려 한다. 그 와중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이 소설은 완벽하게 나의 취향을 저격한 작품이었다. 첫 페이지에서부터 나는 마치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울 메이트를 만난 것처럼 반갑고, 설렜다. 특히 이 소설의 대화글이 큰 매력을 뿜어 냈다. 소설 안에 보물 찾기의 선물처럼 숨어 있는 시적인 대화글.



이런 이야기는 너무 야한 가요
하나도 야하지 않은데요
야하지 않을까요
야해도 좋아요
야한 게 좋나요
야해도 좋다고요



자꾸 소리 내서 읽고 싶은 대화글이었다. 사실 이 소설의 모든 문장들은 소리를 내서 한 글자 한 글자 꼭꼭 씹으면서 읽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간결하고 차분한 문장들이 나의 성향과 정말 잘 맞았다. 그래서 자꾸 하나도 놓치지 않고 천천히 다 읽어내고 싶었던 모양이었나 보다. 그래서 난 이 소설의 80%는 소리를 내서 읽었다. 속으로 읽으면서도 입이 근질근질해서 괴로웠다. 그만큼 이 소설의 문체가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 소설은 '기, 승, 전, 결'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이야기는 없다. 다만 감정의 흐름이 느껴진다. 은교와 무제 사이의 감정이 어떻게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 소설의 끝에서 커져버린 그들이 사랑의 크기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나도 이런 사랑을, 이런 사람을 원했던 거구나. 사랑한다는 그 한 마디 말을 대신해 줄 많은 것들을 주고받으며, 쌓아가며 사랑하고 싶었던 거구나. 사랑한다는 말은 그 말을 대신할 그 무언가가 없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었구나.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숲에서 길을 잃은 두 사람이 소설 첫 페이지에 등장한다. 그리고 그 숲에서 열심히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는 와중 무제가 은교에게 고백을 한다. 좋아한다고. 다행히 숲에서 빠져나온 두 사람은 그 이후 그들의 일상에서 다시 만난다. 고백 이후 첫 만남이지만 별것 없어 보인다. 평범하게 인사를 나누고 같이 점심을 먹는 것 외엔.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애정이 필요하다. 난 불편한 사람과 밥을 못 먹는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불편한 부분이다. 애정이 없는 사람과 먹는 밥은 내 몸에 흡수되지 않고 바깥에서 맴돌다가 볼 일을 볼 때 다 빠져나가버릴 것만 같다. 그런 의미에서 고백 이후 처음 이들이 밥을 먹는 것이 난 참 좋았다. 이제 그 사람과 밥이 먹고 싶어진 것이다. 정말 좋아졌다는 것이다.



점심을 함께 먹은 이후로도 그 둘 사이에 화르르 타오르는 무언가는 없다. 이제부터 너와 나는 연인이라는 선언도 없고, 나는 네가 좋은데 너는 내가 좋으냐? 하는 물음도 없다. 무제는 그런 사람이다. 은교에게 자신의 감정을 얘기한 것일 뿐, 그녀에게 그 어떤 것을 바라지도 묻지도 않는다. 함께 점심 먹자고 하고, 잠깐 들러 그녀의 손에 무언가를 꼭 쥐여주곤 금세 사라진다. 은교 또한 우리는 어떤 사이인가요?를 묻지도, 자신의 감정이 어떻다는 것을 얘기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가 하는 대로 따를 뿐이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둘은 함께 하는 시간을 쌓아가고, 감정을 쌓아간다. 그리고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커져 버린 사랑을 확인한다. 삭막한 현실,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그렇게 사랑을 키웠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척박한 땅에서 싹을 틔우듯 말이다.



절절한 사연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나에겐 참 절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상가 전체가 철거될지도 모르는 상황, 주변을 둘러보면 철거된 철거될 건물뿐인 그곳에서 사랑을 키워나가는 그들이 좀 안쓰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삭막하고 퍽퍽하고 차가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속에서도 서로에게 의지하며 꿋꿋하게 사랑을 키워나가는 모습이 애잔해 보였다. 힘들면 힘든 대로 노래를 불러가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그들의 사랑을 응원하고 싶었다. 그들에 비춰 나를 봤을 때 내 사랑이 참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사랑하기 좋은 환경에서 고작 이런 사랑밖에 하지 못하는 것인가. 하하.



이 소설은 무척 현실적인 사랑을 그려내는 듯 보이지만 비현실적인 일들이 계속 따라다닌다. 그림자가 사람과 분리되어 독단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것을 이 소설에서는 '그림자가 일어선다'라고 표현한다. 그림자들은 혼자 일어나 아예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도 하고, 몸의 일부에 붙어있기도 한다. 이런 부분이 소설을 읽는 내내 뭔가 기묘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림자는 그 사람들의 어둠을, 아픔을, 괴로움을 나타내는 것일까? 어떤 사람은 집에서 그림자가 일어나 마구 돌아다니는데도 가족 중 그 누구도 그 그림자를 아는 척하지 않는다. 가족들이 그의 아픔, 괴로움을 외면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은교와 무제는 서로의 그림자를 본다. 무제는 은교가 그림자를 따라갈 때 그녀를 붙잡고 그림자를 따라가지 말라고 말한다. 은교는 무제의 그림자가 일어서는 것을 물끄러미 봐준다. 보는 게 아니라 지켜봐 주는 느낌이랄까. 이는 곧 상대의 아픔과 괴로움, 어둠을 바라봐주고 지켜봐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것이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따뜻하면서도 애잔하면서도 희망적이고 기묘한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힘들어도 막막해도 서로의 손을 잡고 노래나 부를까요 하고 말하고 싶은, 또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진다. 그런 사람이라면 결혼이라는 걸, 나의 한 번뿐인 인생을 내어줄 결혼이라는 걸 해 볼만하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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