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시 요리코의 '아이사와 리쿠'를 읽고.
마지막 장을 보고 웃었다. 웃겨서 웃은 게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의 나약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 같아서 웃었다. 리쿠의 마지막 행동에서 나는 그것을 느꼈다.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나약한지, 여린지, 바보 같은지. '그래,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강한 척하느라고...' 리쿠의 등을 토닥여주고 싶었다. 웃으면서.
호시 요리코의 다른 작품인 '오늘의 네코무라 씨'를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따뜻하고 재미있고 뭉클한 느낌이 참 좋았다. 그리고 뜻밖에 인간에 대한 비웃음이 스리슬쩍 담겨있는 것도. 고양이 네코무라의 눈에 보이는 인간들이 얼마나 웃기고 어리석은 존재인지 재치 있게 보여준다. 네코무라는 그런 인간들을 온전히 이해하면서 살아간다. 그에 비해 이번 '아이사와 리쿠'는 대놓고 인간을 비웃는 것 같은 또 한 편으로는 불쌍하게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여러 가지 감정들을 전혀 못 느끼는 것 같은 여중생 리쿠. 슬픔이 뭐야? 사랑이 뭐야? 상처가 뭐야? 왜 눈물을 흘리는 거지?라는 의문을 늘 가지고 산다. 처음엔 정말 그래 보인다. 리쿠라는 인물은 영화 A.I에 나오는 감정 없는 로봇 인간 같은 느낌을 준다. '엄마라는 존재는 참 성가셔'라는 생각을 늘 달고 살 만큼 말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깊은 분노, 깊은 슬픔, 깊은 상처가 내재되어 있는 아이임을 느낄 수가 있다.
다정하고 똑똑하고 완벽해 보이는 아빠는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고, 완벽주의를 추구하고 자기애가 지나치게 강한 엄마는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쿨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내 앞에서는 누구보다도 아내를 사랑하는 척하면서도 바람을 피는 아빠를 보면서, 알면서도 모르는 척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엄마를 보면서 리쿠는 연민과 분노를 느끼지만 스스로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자신의 엄마처럼. 하지만 중간중간 리쿠가 본능적으로 하게 되는 행동들을 보면 그녀의 내재되어 있는 분노, 슬픔, 상처를 느낄 수 있다.
아빠의 내연녀가 사 온 새를 죽이려고 하거나, 자신에게 친절한 남자들에 대해하는 말을 보면 그 분노와 불신이 꽤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부모와의 삶은 타인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품게 만들었다. 때론 아예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부모에게는 그 흔한 어리광 한 번 부리지 않고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친구들에게도 한 번도 진심으로 대한 적이 없다. 마치 진심이라는 것이 아예 없는 사람처럼. 그런 리쿠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강해 보이기도 하지만, 결코 절대로 타인의 세계와 결합되지 못할 것처럼 차가워 보이지만, 그 무엇으로도 그녀를 무너뜨릴 수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리쿠는 와르르 무너졌고, 그런 그녀를 무너뜨린 건 별것 아닌 것들이었다.
별것 아닌 것 같은 모래알과 같은 일들이 쌓이고 쌓여 그녀를 주저앉게 만들었다. 리쿠는 엄마의 일 때문에 억지로 간사이 지방 고모 집으로 보내진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별것 아닌 일상들이 별것 아닌 따뜻한 일상들이 결국 거짓 눈물밖에 흘릴 수 없었던 그녀의 눈에서 진짜 눈물을 쏟게 만들었다. 그것도 엉엉.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냉혈인, 절대 부러지지 않을 것 같은 강철인. 실제로 그들이 정말 강할까? 아니다. 인간은 절대 그럴 수 없는 것 같다. 그런 사람들도 지나가는 작은 일에 남몰래 감동받고, 남몰래 따뜻해하고, 남몰래 상처받고, 남몰래 무너진다. 우연히 꼬옥 쥐여준 온기가 담긴 악수 한 번으로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는 게 바로 인간이다. 또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사람도 사소하지만 따뜻한 말과 행동들로 인해 서서히 변해가기도 한다. 물론 단 한 번으로는 어렵겠지만 말이다.
리쿠와 리쿠의 부모 눈엔 보잘 것 없어 보였던 사람들이지만 결국 깊고 심한 상처를 가진 리쿠를 치유한 건 리쿠의 부모가 아니라 간사이 고모 집 식구들이었다. 그 식구들의 별것 아닌 따뜻한 일상들이었다. 우리는 대단한 것들이 우리를 변화시킨다고, 대단한 것 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둘 다 아니다. 우린 그저 인간일 뿐이다. 대단할 수도, 대단해야 할 이유도 없는 인간이다. 별것 아닌 것에 상처받고, 별것 아닌 것으로 치유받고, 별것 아닌 것에 울고, 웃고 하는 게 인간인 것이다.
이 책을 읽은 후 나의 감정에 엄격해왔던 나를 비웃었다. 상처받지 않으려던 나의 과거를 떠올리며 비웃었다. 어차피 나는 나약하고 여린 인간일 뿐인 걸 뭘 그리 버티며 살아갔던 것일까. 울 수도 있고, 화가 날 수도 있고, 상처받을 수도 있는데 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인데 뭘 그렇게 힘들게 피해 다녔을까.
또 한 편으론 그랬던 나를 위로하면서 과거의 나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리쿠의 친척들처럼 그렇게 온기로 다가가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누군가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고, 그럴 의도를 가질 필요도 없이 나도 이리 휘청 저리 휘청 흔들리면서도 온기를 잃지 않고,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의지도 하면서 의지될 수도 있는 사람이 됐으면 하고 생각했다.
문득 엄마의 문자 하나에 펑펑 눈물을 쏟았던 기억이 난다. 캡쳐해서 아직도 보관하고 있는 문자.
누구보다도 엄마는 큰 딸을 사랑한단다.
시작은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