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괜찮은 눈이 온다>
버스로 서너 정거장 정도의 거리에 책방이 생겼다. 커피와 와인이 부제인 책방이다. 이런 책방들이 서울에만 잔뜩 모여 있어서 아쉬웠는데 동네에도 생겨 무척 반가웠다.
출근 시간까지 조금 촉박했지만 그만큼 서둘러 집을 나섰다. 반기는 바람이 조금 따뜻하게 느껴졌다. 좀처럼 겨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 찜찜했다. 움직이기엔 한결 편하지만 나의 편함으로 인해 분명 어떤 존재들은 불편할 테니까. 겨울이 겨울답게 추워야 다가오는 봄이 훨씬 더 반가울 텐데......
버스를 타니 금방 도착했다. 내려서도 1분 남짓 걸으니 문이 보였다. 초록색 나무 간판에 커피, 와인, 책이라고 쓰여 있었다. 책, 반가운 단어,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단어. 낯선 공간에 대해 낯을 가리는 편인데 책이라고 쓰여 있는 공간은 나를 편안하게 이끌어준다. 머뭇거림 없이 들어섰다.
운영하시는 분이 당연히 여자분일 거라고 예상했었는데 남자분이 계셨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벌떡 일어서셨다.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내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들어서자마자 왼쪽 책장에 책들이 꽂혀 있었고,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평대에 책이 더 놓여 있었다. 일단 무거운 가방을 놓을 곳을 찾기 위해 왼쪽 공간으로 들어섰다. 마치 독서실처럼 콘센트가 장착된 1인용 책상들도 있었고 창을 바라보고 편안하게 앉을 수 있는 1인용 소파와 테이블도 있었고, 와인바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벨벳 소파도 있었다. 그야말로 커피와 와인과 책이 섞인 공간 그 자체였다.
나는 창가의 소파 자리에 가방을 놓고 본격적으로 책 탐색에 나섰다. 천천히 책들을 훑어보았다. 좋아하는 책들이 꽤 많았다. 이미 내가 읽은 책들이라 좀 아쉬웠다. 살 수가 없으니까. 그래도 나와 통하는 곳 같아서 괜히 설렜다. 책으로 통했으니 이 공간은 합격! 나 혼자 합격 점수를 줬다.
마음에 드는 책들은 이미 내가 소장하고 있고, 소장하지 않은 것들 중에서는 딱히 끌리는 책이 없어 고민을 하다가 최근 도서관에서 빌린 책 중에서 1장을 읽고 '헉!' 소리를 냈던 책이 그곳에 있길래 집어 들었다. 그래, 이 책을 사자. 책방이니까 책을 팔아드려야지.
책을 둘러본 지 거의 10분 만에 책 한 권을 들고 계산을 하러 갔다. 그리고 오랜만에 바닐라 라테를 시켰다. 나만의 방법이다. 이 집 커피가 마음에 들지 안 들지를 바닐라 라테로 가늠한다. 바닐라 라테가 내 맘에 들면 오케이다. 평소 우유를 피하기 위해 밖에서는 라테를 안 시키는데 오늘은 어쩔 수 없이 한 잔.
책 먼저 받아 드디어 자리에 앉았다. 창으로 보이는 것이 정비소인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그 풍경 대신 책으로 눈을 돌렸다. 1장을 읽자마자 나를 놀라게 한 그 책으로. 그 책은 바로 한지혜 작가의 <참 괜찮은 눈이 온다>이다.
이틀 전에 도서관에서 빌렸다. 빌려서 오자마자 1장을 읽었는데 나도 모르게 너무 몰입을 해서 깜짝 놀랐다. 에세이를 읽으면서 이렇게 집중하고 몰입했던 적이 있었나? 내 기억으론 없는 것 같다. 문체나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서 아껴 읽으려고 덮어버린 적은 있지만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읽었던 에세이는 없었던 것 같다. 자신이 언제부터 어떻게 책을 읽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렇게도 멋지게 써 버리다니.
1장 만으로도 이 책을 소장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글 쓰는 것이 어렵게만 느껴져 겨우 천근만근 같은 손가락 하나하나를 움직이며 쓰고 있는 요즘 더욱 나의 손가락을 무겁게 만드는 글이었다. 좋은 글은 나를 설레게도 하지만 좌절하게도 한다. 하지만 또 아이러니한 건 그 덕분에 나는 이렇게 지금 꾸역꾸역 글 한 편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코 그녀만큼 쓸 수는 없지만, 없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나의 글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쓸 것이다. 안 써지더라도, 안 써지는 글을, 좋지 않은 글을, 어쨌거나 글을.
책방의 라테는 맛있었다. 달달함이 얼음이 녹아도 싱거워지지 않았다. 음, 그렇다면 최종 합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