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를 쓴답시고 약 두 달 동안 너무 많은 에세이를 읽었다. 한꺼번에 많은 양을 읽다 보니 조금 질리기 시작했다. 나의 글조차도. ‘괜찮다’고 말하는 에세이가 정말 많다. 괜찮다는 소리도 여러 번 들으니 반발심이 든다.
‘뭐가 괜찮아? 나는 먹고살기 힘들어 죽겠는데 뭐가?’
‘어떻게 무리를 안 해? 조금이라도 더 일해야 월세를 내는데?’
‘게을러도 괜찮다고? 그럼 돈은 누가 벌어주는데?’
‘고작 인생의 반도 살아보지 않고 그렇게 말하는 건 너무 무책임한 거 아냐?’
등등의 반항심이 마구 들이닥쳤다. 그 반항심들을 상대하다 보니 나는 그런 에세이를 쓰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건 이미 어느 정도 성과를 낸 사람들이 쓸 수 있는 내용이다. 적어도 두 권 이상의 책을 내고, 책 읽는 사람들에게는 이름만 들어도 아는 작가들이나 할 수 있는 이야기. 나는 여전히 방황하고, 실패하고, 또 다짐하는 과정에 있으니 괜찮다는 이야기, 느리게 가자는 이야기, 무리하지 말자는 이야기를 함부로 할 수가 없다. 뭐가 맞는 건지 아직 잘 모르니까.
아등바등 살지 말자고 하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뜨거워서 아등바등하게 된다. 발 위에 불덩이가 떨어졌는데 어떻게 태연하게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뜨거워서 펄쩍펄쩍 뛰고 타고 있는 발에 끼얹을 물도 찾아야 하고, 양동이에 담아야 하고, 발등에 부어야 하고. 그걸로 끝이 아니다. 화상 입은 발등도 치료해야 하고 오랜 시간 동안 절뚝거려야 하고, 다 나을 때까지 치료도 해줘야 한다. 그래도 흉터는 남는다.
반면에 그 지겨워진 에세이들 중에서도 모래 속에서 반짝 빛나고 있는 보석을 발견한 것 같은 작가의 글도 있었다. 힘내라는 말 대신, 괜찮다는 말 대신 그저 덤덤하게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내는 글들. 자신이 얼마나 근사하게 살고 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견뎌왔는지를 말해주는 글들. 그 속에서 느낀 진짜배기 감정들은 애써 위로하지 않아서 오히려 위로되었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 같아서. 저기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눈높이에서 말해주는 것 같아서.
남의 글을 읽다가 괜히 꼬여버린 마음에 심술을 부려보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