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룸'을 보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시간이 나의 나이의 숫자를 키울수록 영화는 혼자 봐야 제맛이라는 생각이 강해진다. 내가 고르는 영화가 그렇다는 말이다. '주토피아'나 '데드풀'같은 영화들은 다른 사람과 함께 봐도 좋겠지만 뭐 그것 또한 취향이 잘 안 맞으면 혼자 보는 게 낫다. 나 혼자 웃고 있으면 굉장히 민망해지니 말이다.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멍하니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혼자 봐서 다행이야. 혼자 생각할 수 있어서 좋다.'
혼자 봐서 다행이야.
혼자 생각할 수 있어서 좋다.
아마 이 영화를 누군가와 함께 봤다면 끝나자마자 일어서서 나가기 바쁘고, 그다음에 뭘 할까? 어디 갈까?라는 상대의 질문 때문에 영화 보는 내내 띄워놓았던 질문들에 답할 시간들을 빼앗겨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시간을 빼앗기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나는 영화를 데이트 일정으로 생각하기보다 나의 인생에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하는 즐거움 거리로 여기기 때문인 것 같다. 아 물론 영화가 끝난 후 함께 얘기를 나누며 내가 생각지도 못 했던 답까지 제시해주는 사람도 있다. 귀한 사람이다.
이 영화를 혼자 봤으니 망정이지 옆에 누가 있었다면 '얘 왜 이래?' 했을 수도 있다. 울다 웃다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옆에 누군가가 앉아있긴 했는데 얼굴도 모르고 다시 볼 사람도 아니니 상관 안 했다. 영화의 몰입을 방해한 것 같아서 좀 죄송스럽긴 했지만...... 이 영화가 의도하지 않은 웃음과 울음이 자꾸 나를 덮쳤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막 당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들은 자신들의 상처와 이별하고 있었다. 잘 가! 하고 인사하고 있었다. 서로를 도와 잘 견뎌낸 두 모자에게 소리 없는 격렬한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나에게도.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들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예민했던 요즘. 한 번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자 모든 것이 표정을 싹 바꿔버렸다. 날씨도, 사람도, 시간도, 내 생각도 모두 싸늘한 표정으로 바꾸고 나를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만든 그것들과 싸우는데 들어가는 에너지가 어마어마하게 컸다. 그때 우연히 '생존자'라는 책을 집어 들게 됐고 그 안에서 '내일을 심려치 않고 오로지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문제'였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게 됐다. 집단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얘기였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고 조금씩 생각이 다시 제자리를 찾기 위해 움직였고, 결정적으로 이 영화가 아주 힘껏 나를 제자리로 잡아당겨주었다.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몇 번이나 눈물을 보였던 이유도 그것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처음 세상 밖으로 나와 창을 통한 하늘이 아닌 진짜 하늘을 바라보던 5살 소년 잭의 눈빛을 보며 울었다. 잭의 눈빛은 하늘을 처음 봐서 놀라고 신기해한다기 보다 경이로운 것을 보았을 때의 눈빛처럼 느껴졌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것을 처음 보았을 때 느끼는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 장면에서 나는 그렇게 눈물이 났다. 이제 깨달은 것처럼. 뒤늦게 깨달은 것처럼. 잭을 통해 이 세상에 이런 하늘이 존재한다는 것을 잊고 있다가 다시 알게 된 사람처럼. 동시에 내가 당연하다고 느꼈던 것들에 대해 미안함이 몰려왔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들에 집중하느라 내팽개쳐져 널브러져 있던 것들이 마구마구 떠올랐다. 진짜로 나에게 소중한 것들. 내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있는 것들이.
그리고 앞으로 잭처럼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가진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소중한 것들에 집중하는 잭처럼. 어른들이 보기에 너무나도 열악했던 그 환경에서도 잭은 엄마와 함께여서 괜찮았다. 잭은 엄마에게 집중했고, 매일 아침 인사를 건네는 침대, 변기, 세면대, 창문의 존재에 집중했다.
앞으로 잭처럼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열악했던 방에서 나온 후에도 잭은 현재에 집중하며 빠르게 적응해갔다. 처음엔 엄마 외에 그 누구에게도 말을 건네지 못하던 잭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주고 머리를 감겨준 할머니에게 "할머니, 사랑해요"라고 말한다. 이 장면에서도 울었다. 잭이 괜찮아진 것 같아서 안도했고, 상처 받은 어른들에게 해주는 말 같아서 뭉클해졌고, 과거든 현재든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해주는 사람들에게 집중하고, 그들을 한없이 사랑하는 그가 부러웠다. 나도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의 상처에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에 그만 집중하고, 내가 가진 것, 내가 사랑하는 것,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집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우습지만, 참 단순하게도 밥이 너무너무 맛있었고, 내가 밥을 먹는 동안 동생과 나누는 대화가 너무너무 재밌었다. 씻을 때 물이 너무나도 따뜻했고, 몸을 눕힌 내 침대가 무척이나 편안했다. 내가 또 눈을 다른 곳에 돌려 나를 힘들게 할 때 이 영화를, 잭을 떠올릴 것 같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당연하게 여긴 것들에 대한 참회를, 당연하게 여긴 것들에 대해 경이로움을 느꼈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