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렌스 데 프레의 '생존자'를 읽다가
기상청이 분명히 '완연한'이란 형용사를 쓰면서 봄 날씨라고 예보한 날 왜 이렇게 추운 거냐며 엄청 구시렁 거리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동생에게. 그리고 감기에 걸렸다. 기상청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어쩔 수 없는 거겠지만 어쨌든 그날은 절대 '완연한' 봄 날씨는 아니었다. 정말이다.
그리고 며칠 후 정말 봄이 왔다. 내 볼에 느껴지는 바람의 온도가 따뜻했다. '그래, 이게 완연한 봄 날씨지!' 진짜로 온 봄에게 이르듯 속으로 외쳤다. 아직은 감기 때문에 패딩 점퍼 신세를 벗어나진 못했지만 그게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분명 따뜻한 바람이었다. 사람을 기분 좋게 해주는 적당한 따뜻함의 온도.
오랜만에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평소보다 빠르게 카페에 도착했다. 커피를 시키고 이어폰을 끼고 책갈피를 잡고 책을 두 갈레로 갈랐다. 마저 읽기 시작했다. 테렌스 데 프레의 '생존자'라는 책이었다. 아직 몸에 봄기운이 남아있는 나는 책을 읽어 내려갔다. 내 귀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도 그 봄기운들과 뒤엉켜 어울리는 듯했다. 한동안 난 책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음악을 껐다. 내 몸에 남아있던 봄기운이 순식간에 도망치듯 사라졌다. 더 이상 난 반가웠던 봄을 즐길 수가 없었다. 이 구절을 읽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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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대지의 잠을 깨우고 그 대지의 부름에 저항할 만한 힘이 없거든, 차라리 삽을 쥐고 손수레를 끌고 나가서 수용소 안의 아무 일이나 찾아내서 하는 편이 낫다. 이때 시선은 낡아 빠진 재소자들의 막사에 고정시켜 두는 것이 좋다. 단 한 순간이라도 자신이 집단 강제수용소 안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아름다운 꿈을 꾸고 난 후에 깨어나서 혹독한 현실을 직면하는 일을 피하기만 하면 불행을 훨씬 덜 수 있을 것이다. 새로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자연, 자신의 주위에서 맥박 치는 그 생명의 경이 속에서 미쳐 버리지 않으려면, 땅속에 뿌리 박힌 바위가 스스로 자리를 옮기지 못하듯, 자기 자신을 집단 강제수용소 안에 단단하게 심어 두는 편이 낫다._스마글레브스카
내가 이토록 반겨했던 봄이 그들에게는 가장 잔인한 계절이었다. 조금 춥다고, 완연한 봄 날씨가 아니라고 투덜댔던 그 봄 말이다. 이미 지나간 꽤 오래전 일들이긴 하지만 이 구절을 읽은 그 순간만큼은 봄을 알은 채 할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다시 집중을 해 책을 읽어나갔다. 갑자기 나에게만 겨울이 찾아온 듯 서늘했다. 마음이.
출근 시간이 다 돼서 짐을 챙겨 카페 밖으로 나왔다. 아까 보다도 더 따뜻했다. 하지만 잠시 그 따스함을 외면했다. 아주 잠시만이라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