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는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를 읽고
취미가 뭐예요?라고 물으면 '독서요.'라고 대답한 지가 10년. 그 대답을 할 때마다 아직도 어색하다. 하지만 그때부터 막 신이 난다. 떠올리기만 해도 신이 나는 나의 취미, 독서.
진정한 애독가들에 비하면 난 읽은 양이 개미 똥만큼이지만 그냥 책만 떠올렸을 때 얻는 기쁨은 그들 못지않을 것 같다. 책은, 책을 읽는 것은 나의 진짜 취미이고, 진짜 휴식이고, 진짜 도피처이고, 진짜 스승이다. 책을 떠올리면, 책을 읽으면 근심, 걱정, 불안, 고민이 꽤 많이 해결이 되고, 해결되지 않는다고 해도 기분 전환이 상당히 효과적으로 빠르게 이루어진다. 나에게 책 속으로의 여행은 천국으로의 여행과 같다.
왜 책이 나에게 이렇게까지 절대적인 존재가 됐을까. 언제부터였을까. 어릴 때의 나는 책을 그다지 많이 보거나 좋아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얼마나 완독한 책이 없으면 하루 만에 완독한 책이 '한석봉'이라는 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까. 그땐 주로 위인전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난 책을 읽는 것보다 독후감 쓰는 것을 더 좋아했다. 간단하게 줄거리만 읽고 독후감을 써냈었고, 선생님께 꽤 자주 칭찬을 받았었다. 특이하게 난 책의 내용보다는 나의 개인적인 경험 위주로 썼던 기억이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그걸 좋게 보신 모양이었다. 운이 좋았다.
어쨌거나 그렇게 책에 큰 관심이 없다가 똑똑한 사람들을 동경하게 되면서 조금씩 책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고작 2-3개월에 한 권씩 읽는 정도랄까. 좀 더 똑똑해지고 싶고, 글을 좀 더 잘 쓰고 싶은 마음에서 책을 더욱 가까이하려고 노력했던 시간들이었다. 그러다가 지금처럼 이렇게 절실하게 책에 매달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어렵고 힘들었던 연애 덕분이었다.
좋고, 행복했던 나날들도 많았지만 그날들 만큼이나 허우적거렸던 나의 연애 시절들. 그 많은 날들 중 어느 날, 나는 물속에서 입만 내밀고 겨우 숨을 쉬고 있는 사람처럼 허우적허우적 거리고 있었다. 그때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우연히 읽게 됐다. 아마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난 그 책을 사뒀던 것 같다. 숨을 쉬기 위에 발끝에 잔뜩 힘을 주고 서서 겨우겨우 수면 위로 입만 내밀며 숨을 쉬고 있던 나에게 이 책은 산소통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 책의 모든 문구들이 나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 줬다. 비로소 난 크게 숨을 내쉴 수 있었고, 그때 난 책의 위력에 대해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연애만큼 인간을 성숙하게 만드는 인생의 선생님은 없습니다. 또 내가 어떤 사람인가, 그 바닥, 그 밑천을 보여주는 것이 연애만큼 좋은 것이 없어요.
-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중에서 -
지금 생각하면 그냥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연애가 뭐 그리 숨을 헐떡거릴 정도로 힘들었을까 나 스스로를 비웃게 되지만 그때의 난 안타깝게도 그랬다. 그런 내가 책만 붙들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니 책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고 그때 용케도 책 읽는 즐거움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얼마 전 영국에서 재미있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영국 서식스 대학교 인지 심경 심리학과 데이비드 루이스 박사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독서, 산책, 음악 감상, 게임, 커피 마시기 등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방법으로 흔히 떠올리는 활동들 중 가장 효과가 좋은 것은 바로 독서라고 한다. 6분 정도 책을 읽으면 스트레스가 69퍼센트 감소되고, 근육 긴장이 풀어지며 심박수가 낮아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로 나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힘이 들 때마다 책을 읽는다. 밝고 긍정적인 내용의 책이 아니라고 해도 책을 읽는 행위 자체만으로 자연스럽게 기분이 전환되고 털어 내고 싶었던 감정들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책에는 그런 힘이 있다. 보편적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에게 책은 그런 힘을 아주 많이 내어주었다. 땅에 굳건히 발을 디디고 서지 못하고 미풍에도 이리저리 날렸던 나에게 땅에 발을 딛고 설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땅에 발을 딛고 선 후에는 강풍에도 조금은 버틸 수 있는 다리의 힘을 키워줬다. 몸의 힘이 아니라 마음의 힘을 키워준 것이다.
물론 책만이 그런 힘을 가진 것은 아니다. 아마도 그때 나에게 가장 쉽고 가까이에 있었던 것이 책이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상황이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난 그게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아무리 생각해도 책을 읽는 것만큼 즉각적으로 쉽게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나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 별로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난 이제 나를 힘들게 했던 연애가 (연애가 힘들었다는 것이지 상대가 나를 힘들게 했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고맙다. 그 연애 덕분에 난 악착같이 책에 매달릴 수 있었고, 책을 읽는 즐거움을 알기까지 지속할 수 있었고, 지금 그 무엇보다 재밌고 즐거운 취미를 갖게 됐으니 말이다.
책을 접하기 전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얼마나 성장했는지는 사실 내 입으로 말하기도 그렇고, 정확한 수치도 없어 언급하지 않더라도 꼭 얘기하고 싶은 건 책을 접한 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되고, 나를 쉬게 하고 나 스스로를 기쁘게 하는 방법을 알게 되고, 나를 컨트롤하는 방법을 알게 되고, 글을 더욱 길게 쓰는 힘이 생겼다는 점이다. 예전 블로그의 글들을 보면 대부분 짧다. 깊게 생각하고 글을 쓰지 않고 막 생각나는 감정만 기록하듯 썼었다. 그때에 비해 그래도 꽤 길게 글을 써나갈 힘은 좀 생긴 것 같다.
책이라는 도구가 없을 때 난 나를 컨트롤하지 못 했다. 스트레스를 온몸으로 흡수했고, 끙끙 앓았다. 하지만 지금은 당장 책을 집어 든다. 일단 책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하면 처음엔 나를 힘들게 했던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서 좋고, 좀 더 읽다 보면 자꾸 무언가가 하고 싶어져서 좋다. 꺼져있던 의욕이 다시 서서히 일어서는 것이다. 스트레스 때문에 아무것도 하기 싫고 할 수 없었던 나는 책을 읽으면서 엉덩이가 근질근질함을 느끼고, 해야 하는 일들이 자꾸 생각이 나서 책을 계속 읽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고 만다. 그럼 난 그때 책을 덮고 떠올랐던 일들을 하나하나 해치우기 시작한다.
책은 결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책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가까이하면 결코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내가 내어준 시간을 홀랑 먹고 튀지 않는다. 오히려 이자를 붙여 되돌려주는 존재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아주아주 의리 있는 놈임은 확실하다. 아마 내가 버리지 않는 이상 절대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리 있는 책과 죽을 때까지 함께 하고 싶다. 앞으로 그와 함께한 10년이 지나면 또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까?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앞선다.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모습으로 살고 싶다면, 갑작스러운 인생의 위기에 흔들리고 싶지 않다면 매일 조금씩이라도 좋으니 꾸준하게 책을 읽어라. 독서를 시작했다면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다. 삶의 고비를 넘는 지혜는 책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