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를 읽고
얀 마텔이라는 이름의 이 작가는 마르지 않는 이야기의 샘이 집 정원에 있기라도 한 걸까. 어쩌면 이렇게 한정된 공간과 상황 속에서 끝도 없는 이야기들이 계속 이어질 수가 있을까. 그것도 너무나도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말이다. 이 소설만 보면 천부적인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작가는 분명.
재미와 깊이를 모두 완벽하게 갖춘 소설을 읽게 돼서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런 소설이야말로 삶의 활력을 만들어준다.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일 것을 아는 권태로움 가득한 일상에서 벗어나 작가가 이끄는 대로의 여행을 떠나는 것 같은 기분. 그것도 아주 흥미진진하고 새롭고 즐겁고 재미있는 여행 말이다. 어떨 땐 좀처럼 일상으로 돌아오기 싫을 정도로 깊이 이 소설에 푹 빠지기도 했다. 완전한 일탈이었고, 이것이야말로 완전한 휴식이었다.
"휴식을 좀 취하세요.", "좀 쉬셔야 합니다."라는 말을 직접 듣거나 티브이를 통해서 보게 되면 늘 드는 생각이 있었다. 무엇이 진정한 휴식인가. 잠을 자는 것? 몸을 눕히는 것? 가만히 앉아있는 것? 산책하는 것? 멍 때리는 것? 즉 정신적인 휴식? 육체적인 휴식? 둘 다? 하지만 어떻게? 나는 휴식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었다. '집에 가서 좀 쉬어'라는 얘기를 들으면 무작정 집에 가서 몸을 뉘어보지만 머릿속은 계속 시끄럽다. 머리가 하는 생각들을 잠시 멈출 수 있는 스위치가 있다면 좋겠지만 내 몸은 사실 내 것이 아니라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몸은 조금만 누워있어도 짓눌린 머리에 피가 안 통해 지끈지끈 거리고 허리는 뻐근해진다. 쉬는 게 쉬는 게 아닌 것 같은 기분. 몸과 마음과 머리가 더욱 무거워지는 느낌.
'아... 진짜로 쉬고 싶다......'
난 이 소설을 읽다가 내 머릿속에 불이 확 켜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이게 쉬는 거야. 이게 바로 내가 원하는 휴식이야. 몸에 최대한 힘을 풀고 편안하게 앉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작가가 이끄는 세계로 풍덩 빠져들어 잠시 동안 머릿속이 그의 이야기로 가득 차 버리는 것. 현실의 것을 몽땅 밀어버리고 소설의 세계가 가득 차는 것.
파이 이야기가 나에게 온전한 휴식을 선물했다. 모든 소설이 나를 쉬게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소설은 나에게 스트레스를 더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끝없는,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 차있다. 끝나지 않길 바랐다. 아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끝이 났고 나는 너무 아쉬웠다.
딱 100개의 챕터로 구성된 이야기는 단 하나의 챕터도 지루하거나 그냥 지나쳐버리고 싶은 부분이 없을 정도로 탄탄하다. 짧은 단문으로 된 문장들은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이야기에 속도감을 더해주고, 그 위에 유머라는 양념을 팍팍 뿌린다. 읽다가 피식피식 웃은 부분들이 참 많다. 유머는 언제나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는데 빠른 속도감의 문장들 속에 짧게 짧게 치고 들어오는 이 소설의 유머는 그 타이밍이 아주 기가 막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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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하도 고갯짓을 해서, 목이 부러지지 않고 머리통에 붙어 있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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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동물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맞히는 능력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동물을 잘 보살폈고, 동물은 보답으로 과할 정도로 번식을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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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마르 씨는 얼룩말을 보는 것은 고사하고, 이런 동물이 있다는 얘기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
"얼룩말이에요." 내가 말했다.
"붓으로 색칠을 한 건가?"
"아뇨, 아니에요. 원래 저렇게 생겼어요."
"비가 오면 어떻게 되지?"
"아무렇지도 않죠."
"줄무늬가 번지지 않아?"
"아뇨."
긴 망망대해 위에서 표류하는 주인공의 막막한 상황을 그리고 있는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의 유머를 중간중간 끼워 넣으면서 실소를 터트리게 한다.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인간에게, 죽음이 더욱 가까워진 파이가 주는 선물처럼 느껴졌다. 우리 모두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신기하게도 종종 그 사실을 망각한다. 그리고 막 웃기까지 한다.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 유머가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다.
속도감 느껴지는 단문과 더불어 너무나도 세밀하고 세심하고 상상력 넘치는 문장 표현력은 바다 위의 쾌속선처럼 굉장히 빠르게 이 책을 읽어나가게 한다. 주인공 파이의 눈앞에 펼쳐진 자연에 대한 묘사, 그와 함께 있는, 그의 눈에 보이는 동물에 대한 묘사, 그가 느끼는 감정에 대한 묘사가 무척이나 뛰어나다. 눈에 그려지는 것은 물론이며 그 표현이 무척이나 창의적인 것에 또 놀란다. 전에 본 적 없는 감정에 대한 묘사였다.
탐욕스런 목구멍으로 순수하고, 선하고 아름답고, 수정 같은 물이 흘러들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이 문장에서 오랫동안 물을 마시지 못하다가 겨우 물을 마시게 된 파이의 몸이 느꼈을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탐욕스런 목구멍이라는 문장이 너무나도 신선하면서 강렬하게 다가왔다. 또 그는 동물을 아주아주 좋아해서 동물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끼고 사는 사람처럼 그들을 묘사했다. 아니 실제로 동물원을 운영한 게 파이가 아니라 작가였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만큼 그들의 움직임, 그들의 생김새, 행동을 그럴듯하게 묘사했고, 어떤 자극에 의해 반응하는 동물들의 행동에 대해서도 굉장히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 실제로 그들이 그렇게 행동할지 어떨지는 내가 잘 모르지만 충분히 그럴 것처럼 나를 아주 쉽게 설득했다. 문장으로.
몸이 오싹했다. 나뭇잎 사이처럼 구명조끼들 사이로 리처드 파커의 머리가 확실하게 보였다. 엉덩이와 등이 조금 눈에 들어왔다. 누르께하고 줄무늬가 있고, 무진장 컸다. 호랑이는 배 끝부분을 향해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숨을 쉬느라 옆구리를 들먹이는 것 빼면 꼼짝하지 않았다.
그런 묘사들은 마치 영화 제작을 염두에 두고 쓴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세밀했고, 풍부했다. 자세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굉장히 영화적인 시점으로 묘사를 했다고 해야 할까. 구명보트에서 떨어져 나와 바라본 리차드 파커에 대한 묘사가 나에겐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려진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
소설의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나는 의아했다. 이쯤 되면 지루해지거나 뻔하거나 이야기가 계속 반복되거나 억지스러워야 하는데 아님 이쯤에서 끝이 나야하는데 어째서 이 소설은 그렇지 않을까. 내가 읽고 있는 이 부분이 도대체 기승전결 중에 어느 부분인지 내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 언제 끝날 것인지, 어떤 식으로 끝이 날 것인지 정말로 내가 끝을 모르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느낌처럼, 바다의 어느 지점쯤 인도 모르는 채 떠 있는 것처럼 알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았고 지루하지 않았다. 계속 새로운 것들이 떠올랐다. 파이에게도 나에게도 새로운 이야기들이 자꾸만 펼쳐졌다.
어떤 날은 리차드 파커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또 어떤 날은 처음으로 살생을 하게 된 이야기, 또 어떤 날은 리차드 파커와 상어가 싸운 이야기, 또 어떤 날은 폭풍우에 휘말리게 된 이야기, 또 어떤 날은 바다거북이의 피를 마시게 된 이야기, 또 어떤 날은 권태와 공포에 대한 이야기, 또 어떤 날은, 또 어떤 날은...... 이렇게 이야기는 끝을 모르게 계속 이어졌다. 마치 파이의 별명처럼. 그 별명이 그의 끝도 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 때문에 지어진 것처럼.
하지만 그렇게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는 끝이 난다. 파이의 연필이 모두 닳게 되어 더 이상 기록하지 못 했던 것처럼.
이게 마지막 일기였다. 그 후에도 계속 버텼지만 기록하지는 못 했다. 일기장의 구석에 지렁이같이 눌린 자국이 보이는지? 나는 종이가 모자랄 걸로 예상했었다. 하지만 먼저 떨어진 것은 펜이었다.
파이의 흥미진진한 표류 이야기는 마무리가 됐다. 그런데 이런, 끝이 난 것 같았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배의 침몰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 단 한 명의 생존자인 파이를 만나러 온 일본 조사원 둘에게 이렇게 얘기하면서 말이다.
"이제 다른 이야기를 할게요."
파이의 이야기를 믿지 못 하는, 이해하지 못 하는 일본인에게 그들이 납득할만한 또 다른 이야기를 해준 것이다. 이제 두 가지 이야기 중 어떤 것을 믿을지는 일본인들의 몫이었다. 이것은 마치 '믿음'에 대한 또는 '종교'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모든 종교에는 세상에 대한 풀이 즉 교리가 있다. 사람들은 이 각각의 교리들 중에서 자신에게 가장 납득이 갈 만한 것을 골라서 믿는다. 혹은 믿고 싶어서 그 교리들을 이해하려고, 납득하려고 노력하고 공부한다. 마치 파이는 종교가 세상에 대해 해석해놓은 많은 이야기들처럼 두 사람에게 같은 상황에 대한 다른 이야기들을 해주면서 "이 중 어떤 종교를 믿겠나?"라고 질문하는 것만 같았다.
"그럼 말해보세요. 어느 이야기가 사실이든 여러분으로선 상관없고, 또 어느 이야기가 사실인지 증명할 수도 없지요. 그래서 묻는데요, 어느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나요? 어느 쪽이 더 나은가요?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요, 동물이 안 나오는 이야기요?"
사람들의 믿음은 결국 자신의 경험, 선호, 취향 등이 잘 버무려서 그것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다. 결국 어떤 것이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나라는 사람의 배경을 바탕으로 어떤 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것을 선택해서 믿을 것인지만 결정하면 되는 것, 각자의 기준을 통해 나에게 더 나은 것을 믿는 것 아닐까.
결국 파이의 이야기도 어떤 쪽이 진실인지 중요하지 않다. 결국 어떤 이야기이든 나에게 더 나은 것을 믿게 될 테니까. 난 그렇게 결론지었다.
끝이 없을 것 같던 이야기를, 끝을 내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를 아쉬운 듯 작가는 딱 떨어지는 100번째에서 마무리했다. 이제 모든 걸 놓고 다시 현실로 돌아가시오, 온갖 고난 속에서 파이도 살아났지 않소' 하고 말하는 것처럼 매몰차고 깨끗하게 100번에서 끝냈다. 참 아쉬웠다. 파이가 결국은 구출이 되어서 다행이긴 했지만 말이다. 파이의 고난이 나에겐 꿀맛 같은 휴식이었다. 그 휴식처가 사라져서 정말 아쉬웠다. 나는 파이 이야기 책을 덮으면서, 그리고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또 이런 소설을 만나게 되길 짧게나마 기도했다. 파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