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감수자에게 떠넘기지 않기
번역 프로젝트 몇 개 지나고 나니 몇 분기가 훌떡 지나가 버린다. 7월 한 달간 했던 번역이 8월 2주간의 감수를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쉬운 일이 없다는 말처럼, 이번 프로젝트도 이런 저런 고비를 지나 대체로 무난하게 끝났다.
지나고 나니 무난하게 끝났다고 말하지만, 사실 감수 작업이 무척 힘들었다. 분량이 많은 번역 프로젝트여서 여러 번역사가 참여했다. 정확히 몇 명인지 모르겠지만 감수 과정에서 알게 된 바로는 나를 포함 최소 세 명은 넘는 듯했다.
7월 한 달 동안 초벌 번역을 진행하고 8월에 감수 작업을 하는 일정. 다행히 문서 전체가 다 이어지는 것은 아니고 여러 파일로 구성된데다 내용도 제각각이라 번역사마다 여러 낱개 파일을 번역하게 되었다.
전문 용어가 많은 문서들이라서 단어 찾는 데 애를 많이 먹었다. 중국에는 전문 용어가 있지만 한국어에는 딱히 없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 경우도 있다. 다행히 캣툴로 가능한 작업이어서 효율이 괜찮았다. 1차 번역 후에 감수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이럴 때는 이런 생각이 든다. 내 번역본을 감수하는 번역사에게 최대한 민폐(?!)가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 감수하는 사람이 내 번역본을 평가하려는 목적은 아니겠지만, 너무 엉망이면 1차 번역보다 번거로워지는 것이 감수 작업이기에 신경이 쓰였다. 무엇보다도 감수 요율은 번역 요율의 절반. 그만큼 손이 덜 가야 한다.
그런데 나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작업했던 걸까? 감수 작업이 유난히 힘든 파일들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느 한 번역사가 번역한 파일들이었다. 첫 감수 작업으로 전달받은 파일들은 오타도 없고 전문 용어를 정말 열심히 찾은 흔적이 곳곳에 있었다. 정 찾아지지 않는 용어나 원문의 오류로 보이는 부분은 메모를 달아두어서, 감수하는 내가 참고할 수 있었다. 그 많은 분량의 번역본에 오타가 없는 것도 대단한데, 아무리 모니터로 보는 소프트카피라도 번역사의 노력이 묻어나서 약간 감동하기까지 했다.
문제는 다른 번역사의 번역본. 이전 번역사의 잘된 번역본을 감수하고 나서 받은 다른 번역사의 파일은…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애초에 프로젝트 매니저가 감수 파일을 전달할 때부터 느낌이 안 좋았다. 1차 번역을 하신 분이 연락이 안 되는데 일부 덜 번역된 부분이 있으니 내가 감수를 하면서 누락된 부분을 채워달라고 했다. 감수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아무리 본인이 감수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초벌 번역을 한 사람으로서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는 연락이 되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며, 분량이 많으니 일부 번역이 덜 된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하고 감수 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웬걸…. 덜 번역된 부분이 생각보다 많은 것은 물론 번역 자체를 너무 성의없이 해 놓았다. 캣툴 작업은 좋은 점이 많지만 한계도 분명히 있다. 예컨대, PDF파일을 캣툴로 불러올 때 캣툴이 일부 문자를 잘못 인식해서 원문 자체가 이상한 문자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에이전시에서는 번역할 때 참고하라고 언제나 PDF 파일을 같이 준다. 그런데 이 번역사는 딱 봐도 이상한 부분을 PDF원문과 대조하지 않고 그냥 직역, 내지는 한국어 한자 발음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오역은, ‘일치된 플라스틱 제품 위원회’라고 된 부분. 일치된 플라스틱 제품? 이게 무슨 말이지? 캣툴에 나타난 원문은 ‘全同塑料产品委员会(全同塑料產品委員會)’였다. ‘全同’이라는 단어를 ‘일치된’으로 번역한 것 같은데, 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아무리 봐도 이상해서 PDF 파일을 열어 보았다. 알고 보니, ‘全国塑料产品委员会(全國塑料產品委員會, 전국 플라스틱 제품 위원회)’를 캣툴에서 잘못 인식한 것이다. 초벌 번역을 한 사람은 이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는데도 ‘에이, 몰라!! 감수하는 사람이 알아서 하겠지’하는 생각으로 대충 한 걸까?
저와 비슷한 오류가 무척 많았다. 또 하나 기억나는 건, 번역문에 ‘이른 정도’라고 번역된 부분. 이른 정도가 뭐지? ‘도달하는 정도’를 말하는 걸까? 캣툴 원문을 보니 ‘早度’라고 되어 있었다. 이것만 보면 이른 정도라고 직역을 하는 게 맞는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문맥상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PDF 파일을 다시 확인했다. ‘厚度(두께)’라고 되어 있었다. 하…. 이쯤 되니 나도 짜증이 솓구쳤다.
웬만한 오타와 실수는 사람이 하는 일인 이상 초벌 번역사가 더블체크를 했다고 해도 발견될 수 있다는 점을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그런 실수의 문제가 아니라 성의의 문제였다. 이런 번역 결과물은 번역하는 사람으로서의 최소한의 노력도 귀찮아했다는 뜻이다.
감수는 초벌 번역본에 대한 기본적인 교정과 수정을 통해 번역본의 완성도를 좀 더 높이는 추가적인 단계, 즉 비유하자면 완성된 스웨터에 코가 빠진 부분은 없는지 보풀이 난 곳은 없는지 정도를 전반적으로 보는 것이지, 초벌 번역사가 헝클어 놓은 꼬인 실타래를 푸는 작업이 아니다.
초벌 번역을 담당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맡은 번역물에 대해 올바른 이해와 정확한 번역을 하고자 하는 노력, 이 당연하면서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번역사로서의 최소한의 매너이자 예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