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 산책 코스 '나가사키 사루쿠(さるく)'
명확한 목적 없이 일단 몸부터 떠나는 여행에서는 하고 싶은 것은 뭐든 해볼 수 있다. 도착한 첫날 드는 생각은 사람 많은 관광지 말고 좋은 날씨를 만끽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발견한 나가사키 투어가이드 앱을 살펴보았다. 이 앱은 '나가사키 관광안내 App'을 검색하고 다운로드하면 된다.
이 앱은 아이폰에서 아주 편히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이런 소도시에서 관광가이드 앱을 만들어 제공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감동이었다. 이미 점심도 먹은 터라 맛집이나 짬뽕맵 같은 부분은 관심이 별로 가지 않았는데, '사루쿠'라는 코너가 궁금해졌다.
사루쿠를 클릭하고 들어가니 '사루쿠'는 '걷다'라는 뜻의 일본어인 '아루쿠歩く'의 사투리 발음이라고 한다. '걷다'라는 뜻이니 분명 산책코스겠다 싶어 반가운 기분이었다. 이 중, 여행 첫날엔 일단 가까운 곳을 둘러보면 좋을 것 같아 나가사키역 인근 코스를 선택했다. 앱에서는 120분 코스라고 나오길래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고 길을 나섰지만, 천천히 걸었음에도 1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가벼운 코스기에 첫날 가볍게 나가사키역 주변을 돌아보기에 안성맞춤이다.
도착하자마자 아뮤플라자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는 무얼 할까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사루쿠 코스를 발견하자 마음이 급해져(?이유는 모르겠다;;) 마시던 커피의 뚜껑을 닫아 들고 그 길로 산책에 나섰다.
날씨마저 산책에 제격이었고 이제 막 도착한 낯선 곳에서의 산책이 설레기 시작했다. 도착한 지 2시간도 채 되지 않았음에도 숙소가 나가사키역에 있다 보니 어느새 나가사키역이 가장 편한 곳이 되었다. 편한 곳을 떠나 처음 가는 길을 나서는 것은 왠지 모르게 설레면서도 두려움이 이는 순간이다.
육교를 건너가던 중 나가사키의 주요 교통수단 중 하나인 노면전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니 2016년 신정에 떠났던 신년 여행으로 갔던 대련 생각이 났다. 둘 다 클래식함을 갖추고 있는 예쁜 트램인데, 주변 환경이 다르니 대련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나가사키역 인근 사루쿠 코스는 '니시자카공원(26성인순교지) - 혼렌지 - 나카마치 성당 - 사이쇼지 - 나가사키 역사문화박물관'으로 진행된다. 아직 정확한 위치를 잘 모를 때였기에, 니시자카 공원이 멀리 있다고 생각되어 먼저 나카마치 성당에서 시작해 다시 돌아와 니시자카공원까지 갈 계획이었다.
앱 자체에서 현재 위치도 표시를 해주기 때문에, 앱이 표시하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산책코스에 만날 수 있는 성당과 절들이 어느새 눈 앞에 나타난다.
처음 만난 것이 나카마치 성당中町教会이었다. 안으로 들어가 볼까 했으나, 뭔가 조심스러웠다. 아직 낯선 곳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남편과 같이 갔다면 아마 들어가 봤을 텐데 말이다.
나카마치성당은 26성인에게 바쳐진 성당으로 내부도 매우 성스러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본인은 산책을 목적으로 그저 지나갔기 때문에 내부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외부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으로 사이쇼지西勝寺를 지났다. 천주교 탄압으로 불교로 개종한 선교사와 관련된 절이라고 한다. 나가사키는 곳곳이 천주교와 많은 연관이 있어 성지순례로도 많이 오는 곳이라고 한다.
다음 목적지인 나가사키 역사문화박물관을 향해 걸어가던 중, 귀여운 건물에 원조 밤만쥬를 팔고 있는 다나카 쿄쿠에이도田中旭栄堂를 지나갔다. 명물이라고 하니 하나 먹어볼까 생각만 하다가 일단은 그냥 지나갔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가는 길에 '아 뭐 별거 있나...먹고 싶음 먹는거지..'라는 생각을 하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여러 가지 크기의 밤만쥬가 있었는데, 그중 가장 작은 (밤이 한 개 든) 밤만쥬를 골라 들고 나왔다. 하나에 130엔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첫맛은 그냥 일반적인 밤만쥬 맛이었는데, 먹다가 달달함이 느껴져서 보니 진짜 노오란 밤이 하나 들어있었다. 먹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사이쇼지에서 조금 더 가다 보면 나가사키역 인근 코스의 마지막인 나가사키 역사문화박물관의 웅장한 모습이 나타난다. 위 사진은 마치 전신주와 전선을 찍은 듯 초점이 이상한 곳에 있다만, 저 사진의 주인공은 오른편의 주변 아기자기한 주택들과는 뭔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박물관이다. 쾌청한 날씨를 계속 즐기고 싶은 마음에 역시 내부는 들어가지 않았다.
나가사키역 인근 코스는 직진 코스이기 때문에 길이 어렵지 않다. 이 코스의 시작점인 26성인순교지로 가기 위해 발길을 돌렸는데 돌아가는 길은 아까 왔던 길보다 위쪽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가다 보니 혼렌지本蓮寺와 같은 원래 코스에는 나오지 않는 절도 만날 수 있었다.
니시자카공원으로 향하며 눈물 나게 아름다운 가을을 만끽했다. 이런 사진이 나온 것은 아날로그 앱 덕분일까? ㅎㅎ 단풍이며 돌계단이며, 구름까지 너무 적절히 자기 자리에 있는 것 같아 기분 좋았다.
26성인순교지에서 가장 먼저 만난 것은 '성필립보 교회'인 니시자카성당西坂教会이다. 시간이 느껴지는 여기저기 색 바랜 성당 벽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공원 쪽의 니시자카 언덕에 올랐다. 사루쿠 코스로 지나온 길을 보니, 저 멀리 거대한 후쿠사이지福済寺의 부처님이 보였다.
천주교가 일본에 처음으로 들어온 곳이 나가사키였는데,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종교가 정착하기까지는 많은 박해가 있었다. 그중,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주교를 박해하면서 도쿄와 오사카에 있는 선교자나 신자까지 나가사키로 데려가 외국인을 포함한 총 26명의 선교사/신자를 처형한 곳이 바로 니시자카 언덕이고 이를 기리기 위해 26성인순교지에 순교비와 기념관을 만들었다.
내가 여행을 갔던 때는 날씨가 매우 좋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수학여행 온 중/고등학생이 많았다. 내가 들르는 곳마다 선생님과 학생들이 많이 보였고 덕분에 더 활기찬 분위기에 여행할 수 있었다. 26성인순교비 앞에서 단체사진 촬영하는 모습을 여행하는 내내 하루에 한 번씩 보았다.
위 사진에는 잘 보면(사진 왼쪽 아래 ㅎㅎ) 인연 깊은 고양이도 있다. 첫날은 발끝에 잠깐 왔다가 거리를 두고 그루밍하던 녀석이 마지막 날엔 무릎에서 잠까지 자다니... 요즘도 자주 생각나는 녀석이다. 누군가 이 글을 보고 나가사키 여행을 가게 된다면 저 아이에게 안부를 전해주면 좋겠다.
여행 첫날은 바삐 돌아다니기보다는 여유를 가지고 주변을 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산책은 주변 지리 익히기에도 좋고 의외의 소소한 재미와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역시 대도시 여행이 아닌 '소도시 여행'이기에 가능한 여행 타입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