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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도시에서 찾는 숨은 재미

일본 사가여행 프롤로그

by DANA
소(小) of 소(小) 도시, 사가현 여행

만 30세 생일날 남편에게 여행가자고 조르다가 퇴짜맞고 난 다음날, 남편은 이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바로 사가행 티켓을 구매해 나에게 안겨주었다. 왜 '사가'였냐면, 티켓이 싸기도 했고(왕복 2인 20만원), 최근 일본 소도시의 매력에 푹 빠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지금껏 다닌 일본 소도시 중 가장 작고 정겨웠던 곳이 이번 '사가'였다.


여느 여행과 마찬가지로 여행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다. 일본 여행은 특히나 사전준비를 안하는 편인데, 그 이유는 관광안내소가 너무 잘 되어 있고 현지에 비치된 가이드맵이 매우 알차기 때문이다. 사가시내에 88개나 되는 에비스가 있다는 것을 도착한 날에서야 가이드맵을 통해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사가에는 이렇게 기대하지 않은 재미가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이런 재미들이 매일매일 여행을 가득채워 준다.


사가에 갓파가 있다는 것 역시 사가행 비행기에서 알게 되었다. 도착한 첫날 무엇을 할까 고민을 하던 중 기내지에 소개된 사가여행 이야기를 보았는데, 마츠바라(松原) 근처에 갓파 석상이 있다고 했다. 갓파는 예전에 '갓파쿠와 여름방학을'이라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사가에서 그 갓파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갓파 석상은 사가신사 옆에 있는 작은 냇가를 따라 가다보면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애니메이션에서 본 '쿠-'와 비슷하게 생긴 갓파도 있고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갓파도 있는데, 익살스러운 모습은 그대로였다. 아직 가을냄새가 남은 사가의 단풍과 갓파 석상을 찾아가며 산책을 하는 것도 꽤 재미나다.


사실 사가에서는 그렇다할 야경을 기대하지 않았다. 사가현청에 전망대가 있긴 하나, 도시 자체가 작다보니 야경이랄 것이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들렀다. 때마침 특별할 것 없는 야경을 특별하게 만든 'SAGA Night of Light'라는 캠페인(내지는 이벤트)가 진행중이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조용한 사가시의 모습을 배경으로 음악과 빔프로젝터의 영상이 더해져 한편의 영화처럼 상영되었다. 짧았지만, 임팩트있는 야경감상이었다.


크리스마스를 목전에 둔 시기였기 때문에 사가시는 곳곳에 아름다운 일루미네이션이 반짝였다. 사가역을 중심으로 길게 뻗은 츄오도-리(中央通り)에는 가로수들이 예쁘게 꾸며져있고 개인 상점들도 일루미네이션에 참가하여 밤거리를 밝힌다. 저녁에 이 거리를 산책하면 날씨는 한겨울이 아닌데도 크리스마스 느낌을 한껏 받을 수 있다.


둘째날은 다케오로 향했다. 비가 주룩주룩내린 날이었지만, 우산하나에 남편과 둘이 걷는 시간이 좋았고 어찌보면 온천에 제격인 날씨였다. 츠타야와의 콜라보로 만들어진 다케오 도서관은 지금까지 본인이 가본 도서관 중 가장 편안한 분위기였다. 도서관과 서점, 까페가 어울어져 그럴 수 있었겠으나, 조명이나 분위기 모든 것이 '이곳에서는 반드시 공부를 해야한다'라는 기분보다는 '책읽으며 쉬어가자'하는 생각을 들게 했다.


다케오 도서관 바로 옆에 있는 다케오 신사에는 유명한 3000년된 녹나무가 있다.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수령(樹齡)임과 동시에 그 자태 또한 신비로웠다. 어느정도 등반을 각오하고 숲길에 올랐다. 저런 나무는 당연히 숲 속 깊이 있을거라는 생각이었다. 비가 와서 미끄러운 숲길이라 바닥을 보며 조심조심 걸어갔는데, 사진에서 많이 보던 대나무 숲이 나와 사진을 찍으려고 고개를 드니 얼마 앞에 녹나무가 보인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비오는 날씨와 가장 잘 어울린 공간이었다. 추적추적 빗소리와 바람소리가 더해져서 그런지 녹나무는 더 신비로워 보였다. 한번도 신사에서 헌금을 한 적이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절로 헌금함에 100엔을 넣게 되는 진짜 신이 살 것 같은 분위기였다.


셋째날은 렌트카 여행을 감행했다. 원래는 JR로 아리타까지만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이마리에 꽂힌 남편이 렌터카로 이마리와 아리타를 모두 돌아보아야겠다고 했다. 시간 배분 상으로나 효율 상으로나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렌터카를 빌리는 과정의 이야기는 추후 공유해보록 한다. 결과적으로 이 셋째날의 렌터카 여행은 이번 여행에서 가장 즐거웠던 하루다.


아침 일찍 방문했던 이마리(伊万里)시의 오카와치야마(大川内山)는 매우 조용했고 추운 날씨였지만 고즈넉했다. 원래 도자기사러 오는 사람들로 북적대는 곳이라고 했는데, 이른 시간이라 그랬는지 이 날은 일본 천황탄생일로 휴일이었는데도 관광객이 많지 않았다.


이마리 시내에는 에도 시대에 배를 타고 도자기를 사러 온 사람들에게 아리타에서 만든 도자기를 팔던 상점 유적이 있다. 전시관으로 잘 꾸며놓았다고 해서 갔는데, 뜻밖에 마을 어르신이 계셔 건물 역사와 에도 시대 도자기를 사가던 과정 등을 생생히 들을 수 있었다. 들려달라고 하지는 않았으나, 우리가 들어가자마자 자동으로 건물 역사부터 시작해서 설명을 해주셨다. 다큐멘터리의 리포터가 된 기분이었다. ^^;; 이부분은 나중에 동영상으로 공유하려고 한다.


이마리에서 아리타로 가는 길에 만난 계단식 논
아리타(有田) 이즈미야마(泉山) 채석장
도잔신사(陶山神社)의 도조 이삼평 비

셋째날은 변화무쌍하고 추운 날씨 덕분에(?!) 차를 렌트한 것이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을 계속 했다. 맑은 날씨였다면 좋았겠지만, 흐리면 흐린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또 재미가 있다. 차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도 계속 느끼고 말이다. ^^;; 남편은 계속 그로데스크한 사진들이 찍힌다며 좋아하기도 했다.


아리타에 왔는데 그릇을 사지않을 수 없다. 남편과 이태원 MMMG에 갔을 때 항상 보던 1616아리타재팬 그릇을 싸게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아울렛 형태로 여러 도자기 가게가 모여있는 '아리타 도자기마을 플라자(有田陶磁の里プラザ)'에 있는 모모타토엔(百田陶園)에서 국내 판매가의 반값에 스퀘어 접시 6종 세트를 살 수 있었다. 나도 그릇에 관심이 많은 주부라는 것을 느낀 순간이었다.


여행경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식도락 역시 빠질 수 없다. 와규에 눈을 뜬 나는 사가규(佐賀牛)가 맛있다는 소식을 진작부터 접하였고 남편은 1일 1소고기를 맛보여주겠다고 매일 유명하다는 소고기 스테이크집을 찾아다녔다. 남편의 노력 덕분에 테이블 달랑 세개에 동네 분들이 주로 즐겨가는 오랜 노포에서 맛있는 사가규 스테이크를 처음 맛보게 되었다.


다케오에 유명한 에키벤인 사가규 스테이크 도시락도 맛보았다. 서로인 성애자답게 서로인 스케이크 벤토로 골랐는데 가장 비싸지만 후회없는 선택이었다.


렌트한 날 역시 어김없이 이마리규(伊万里牛)로 유명한 소고기 스테이크집에 들렀는데, 이쯤되니 소고기를 좋아하는 나라도 하루 한번 기름진 소고기를 먹는 것은 매우 힘들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아리타(有田)역에 유명한 야끼카레벤토도 맛보았는데, 고소한 치즈가 올라가 더욱 맛있었던 카레였다. 다 먹은 후에는 도자기 그릇을 집에 가지고 올 수 있어 더 추억에 남았다.


당분간 마지막이 될 여행일 수 있어서 더욱 순간순간에 충실했던 여행이다. 먹는 것 하나에도 평소같으면 비싸니 패스하자고 했을 것들에 언제 또 먹을지 모르니 즐기자는 자세였고 그릇 쇼핑도 사실 그냥 넘어갈까 싶었지만 이번에는 사치부려보겠노라 결심했었다.


시즈오카와 나가사키보다도 작은 도시였던 사가는 분명 조용하고 아담한 곳이지만,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다른 지역에도 에비스는 있겠지만, 사가시만큼 숨은 에비스를 찾는 소소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도시는 또 없을 것이다. 다른 도시에서도 예쁜 일본 도자기 그릇을 살 수는 있지만, 이마리와 아리타만큼 그 유래까지 생각하며 의미있는 쇼핑을 할 수 있는 곳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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