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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A Nov 17. 2019

잊지 못할 나의 동시통역 데뷔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통대 입학하고 언제쯤에나 '진정한' 통역 현장에서 통역을 해볼 수 있을까 기대하면서도 초조해하게 된다. 중요하지 않은 통역 현장이 어디 있겠냐마는 특히 동시통역 같은 경우는 과연 나에게 동시통역 기회가 돌아오긴 할까라는 생각이 자주 드는, 뭔가 나랑은 아직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치열한 통역 준비

그런데 정말 우연히 나에게도 그런 기회가 왔다. 그것도 첫 실전 동시통역치고는 꽤나 하드코어한 주제였다. 갑골문과 석굴 등에 관련한 내용이었다. 이 주제는 동시통역을 하기로 결정이 되고 행사 5일 전 자료를 받은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 전에는 대략적으로 문자학 관련 주제라고만 전해 들었는데, 처음 소개를 받을 땐 분명 자료가 있어 어렵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뭐든 열어보기 전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공부 환경은 언제나 완벽. 문제는 내 마음가짐

사실 처음 요청을 받았을 때 주제가 어렵다고 전해 들었더라도 난 한다고 했을 것 같다. 난이도를 따져가며 골라서 할 상황이 아니다. 한 번의 기회가 아쉽고 또 소중하다. 그리고 세상에 쉬운 통역은 없다. 통역을 쉽게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만큼 통역사가 준비를 많이 했고 완전히 내용을 파악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제안을 받자마자 주제를 듣기도 전에 하겠다고 했고, 자료를 받은 후에도 자료를 보며 잠시 크게 당황했으나, 이내 기분 좋은 스트레스를 느끼며 자료 준비를 시작했다. 물론 문득문득 '이렇게 첫 동시통역이 마지막 동시통역이 되는 건 아니겠지....' 하며 자신감이 뚝뚝 떨어지는 순간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엄청난 PPT분량에 푸념하고 있을 새가 없었다.


통역 끝내고 나올 때 비로소 눈에 들어오던 그날의 행사장 외관

동시통역은 2인 1조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누구와 첫 통역을 하게 될까 궁금했다. 다행히 주최 측에서 나에게 파트너를 고를 수 있게 해 주어 첫 동시통역 파트너는 나와 페어로 가장 많이 연습해 본 동기와 하게 되었다. 워낙 평소에도 잘하는 동기지만, 이렇게 정말 현장에서 같이 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든든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나도 파트너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부담감도 함께 배가 되었다.


당일 오전에도 자료 공부 삼매경

자료는 행사 5일 전에 받았는데, 이 정도면 굉장히 빨리 받은 편인 것 같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료는 당일 급히 주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에, 첫 동시통역은 준비할 시간이 충분했다. 그렇지만 워낙 평소에 접하는 주제가 아니다 보니, 슬라이드 한 장 이해하는데도 관련 분야의 기초 지식까지 더듬어야 해서 시간이 오래 걸렸다. 금요일부터 주말까지 3일 내내 자료 준비에 몰두했다. 이해 안 되는 부분은 학교에서 다른 동기들에게 물어가며 하나하나 짚어갔다. 언젠가 나도 동기들에게 꼭 이 은혜 갚으리. 


우리만의 질서로 정리된 통역 부스

행사 당일 마침 동시통역 수업이 AB, BA 모두 있던 날이라 사전에 교수님들께 양해를 구했다. 교수님들의 진심 어린 응원에 힘이 나면서도, 학교 이름에 먹칠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어깨가 더 무거워졌다. 당일엔 그래도 이 정도면 내가 구할 수 있는 자료는 다 보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료 준비를 했기 때문에, 두렵다기보다는 빨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당일이 되니 두려울 새도 없었던 것 같다. 


총 두 연사의 발표를 동시통역하게 되었는데, 자료 준비하면서 한 분의 자료가 유난히 양도 많고 어렵다고 생각하며 준비할 때도 유난히 애를 많이 먹었다. 상대적으로 다른 한 자료는 슬라이드 이해에 크게 어려움이 없어서 걱정을 덜 했다. 시작 전에 연사분들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운 좋게 어려운 자료의 연사님을 만날 수 있었다. 동시통역으로 진행하니 발화 속도를 너무 빨리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드렸다. 다행히 실제 발표에도 적당한 발화 속도를 유지해주셨고, 시간 관계상 모든 자료를 아주 자세히는 훑지 못해서 우리가 준비한 자료와 이해도로 커버가 가능했다. 이렇게 첫 번째 동시통역이 끝나니 긴장도 좀 누그러졌다.


통역에 키보드 소리 들어갈 것 같아 당일 아침 급한 대로 챙긴 남편의 파이널컷 전용 키커버;;;

이어 두 번째 연사의 발표가 시작되었다. 두 번째 연사분은 사전에 인사를 할 기회가 없었다. 그래도 첫 동시통역을 마치고 어느 정도 감을 잡고 뇌 역시 '동시통역'모드로 전환이 된 상태라고 생각해서 크게 긴장하지 않았다. 그런데 웬걸, 시작했는데 발화 속도가 엄청나다. 그리고 슬라이드만 봐서는 예측할 수 없었던 배경지식 설명이 마구 추가되었다. 처음엔 살짝 당황했지만, 파트너 도움받아 가며 빠른 호흡으로 계속 따라갔다. 그리고 혹시 몰라 프린트해갔던 자료가 마침 파트너 통역에 필요해져서 참고해가며 파트너 역시 무사히 통역을 마쳤다. 두 번째 연사의 발표가 끝나니 둘 다 기진맥진했다. 내 통역이 끝났다고 해서 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말 50분을 둘이 계속 함께 달려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기가 빨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몸소 느낀 순간이었다.


언제나 설레는 통역 마이크 앞

통역이 끝나고 느꼈던 것은 '쉬운 자료란 없고, 쉬운 통역이란 없다. 그렇지만, 어려운 자료도 없고, 어려운 통역도 없다.'였다. 모순되는 말 같지만 정말 그랬다. 쉬울 것이라 예상했던 발표는 생각보다 어려웠고, 어려울 것이라 예상했던 발표는 생각보다 수월했다. 어려워 보이는 것도 준비하면 어느 정도 쉬워질 수 있고, 쉬워 보이는 자료도 방심하면 어려워질 수 있다. 좀 더 잘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도 남았다. 언제나 연사가 어떤 말을 할지는 예상할 수 없다. 자료가 있지만, 자료만 가지고 이야기하는 연사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예상치 못한 연사의 발화도 무던하게 받아들이고 통역하고 싶다. 어쨌든 큰 탈 없이(클레임 없이) 무사히 첫 동시통역을 마친 것에 파트너와 나 모두 스스로 대견했고 뿌듯했다. 수고했다는 말을 좀 더 기분 좋게 한 말이란 것을 알고 있지만, 통역 의뢰하셨던 교수님이 차분하고 톤도 좋았다고 해주셔서 첫 실전 동시통역을 마친 나에겐 무엇보다도 큰 힘이 되는 말이었다.


또다시 시작

또 하고 싶다. 오래 하고 싶고 더 잘하고 싶다. 꼭 이번 실전 동시통역뿐만이 아니라, 동기들과 같이 공부하다 보면 자료 보다가 지쳐서 '아 그냥 대충 하자~~연습이잖아~~' 말로는 이러면서도, 다들 눈과 머리는 계속 자료를 보고 있다. 질문을 하고 찾아보고 또 읽어본다. 이런 동기들을 보면서 '이 사람들은 이걸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이다'라는 걸 느끼고 나도 자극받는다. 나도 누군가에게 자극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비록 다음 실전 동시는 언제가 될지 아직 알 수 없지만(^^;;), 첫 동시통역도 예상치 못하게 찾아왔으니 다음 기회도 적당한 시기에 또 나에게 찾아오겠지. 이제 다시 내 앞에 넘어야 할 산인 졸업시험을 마주해야 한다. 졸업시험은 이런 실전 통역과는 또 다른 개념이다.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최선을 다 하자. 즐거웠다, 나의 첫 동시통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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