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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A Feb 07. 2020

노트테이킹의 정석

과연 정석이 있을까?

처음 통대에 입학하고 수업에서 한 교수님이 앞으로의 목표와 포부 같은 것을 물으셨다. 나는 물론 국제회의 통역사가 되는 것이 목표이자 포부지만, 보다 현실적으로 '노트테이킹을 보다 효율적으로 더 잘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졸업을 앞둔 지금 생각하면 웃긴 일이지만, 막 입학한 당시 입시 준비를 하면서 노트테이킹이 부족해 통역이 생각보다 잘 안된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노트 테이킹만 잘하면 내 통역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내 대답에 교수님의 대답은 그냥 웃음이었다. 이제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안다. 귀여워 보였을 수도 있고, 갈 길이 멀어 보였을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매 통역마다 노트테이킹에 몰두하곤 했다.


2년간 수업에서 쓴 테이킹 노트

머리로 다 기억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노트테이킹의 양은 많아진다. 일단 써두면 안심이 된다. 그런데 연사의 말을 노트테이킹으로 써두면 된다고 생각하고 시작하면 듣기보다 쓰는데 집중을 하게 되고 팔도 아프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렇게 많이 쓰면 나중에 정작 통역을 해야 할 때 내가 쓴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모른다.


2년간 가장 많이 사용한 테이킹 노트 제품

흔히 통역의 과정을 '듣기 - 이해 - 재구성'이라고 한다. 어디에서도 '노트테이킹'은 과정에 넣지 않는다. 즉, 통역에서 노트테이킹은 정말 보조적인 수단이지 '주'가 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런데 통역 공부를 시작한 초기에는 그걸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노트테이킹을 반드시 세로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세로로 길게, 그리고 여백을 많이 두며 써야 뒤에 나오는 꾸며주는 말들을 중간중간에 보충해서 써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터넷에 보면 통역 노트테이킹에서 쓰는 기호들을 정리해서 올려주기도 한다. 이런 것을 보면 '아, 나는 이런 기호 안 쓰는데... 아, 나는 세로로 잘 못 쓰는데...' 하며 초조하고 습관이 잘못 들여진 것 같아 걱정을 하게 된다.



1학기: 양이 많고 한 문장을 가로로 쓰는 것, 문장 구분을 '긴 선'으로 하는 것이 특징, 흡사 속기;; (색깔펜은 크리틱때 보충하는 내용들)


물론 기호화하는 것은 중요하다. 테이킹의 경제성을 높일 수 있고 나중에 알아보기도 쉽다. 그런데 누군가 정리해준 기호를 외우는 것이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다. 일단 이렇게 나만의 규칙 없이 다른 사람이 정한 규칙을 막무가내로 외우면, 실제 테이킹 때는 생각이 안 난다. '이거 기호로 어떻게 쓰더라?'라고 생각하는 사이에 연사 말 몇 마디가 후루룩 지나간다.

 

2학기: 일부 자주 쓰는 용어들이 기호화되고 문장 구분을 짧은 선으로 함

그래서 스스로 기호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갑자기 'oo는 xx로 써야지!'하고 선언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다. 계속 통역 연습을 하면서 자주 나오는 것들은 스스로 기호로 대체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고 이것저것 시도하다 보면 어느 순간 바로 생각나는 기호 또는 글자가 있다. 그렇게 하나하나 기호화되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사람에 따라 테이킹에서 쓰는 기호는 다른 것이 당연하다.

 

3학기: 화살표 활용이 많아지고 여백을 많이 둠

세로로 써야 한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세로로 쓰는 것이 편한 사람이 있고, 애초에 종이를 가로로 길게 두고 한 문장을 가로 한 줄에 다 쓰는 사람도 있다. 세로든 가로든 방향은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편한 방향으로 쓰면 그만이다. 애초에 테이킹 자체가 나 보기 편하라고 쓰는 것 아닌가.

여백을 많이 두는 것이 좋다는 말은 어느 정도 동의한다. 연사가 뒤에서 갑자기 보충을 하는 경우도 있고 어순상 꾸며주는 말이 뒤에 나올 때도 있다. 그럴 때는 통역사가 연사의 말을 정리해서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에 꾸밈 받는 부분에 여백이 있어야 보충이 편하다.   


4학기: 한 문장을 가로로 쓸 때도 있고 세로로 쓸 때도 있음. 노트테이킹에 대한 미련과 부담이 처음보다 많이 사라짐

결국 노트테이킹에 정해진 왕도란 없다. 자신에게 편하면 그만이다. '좋은 노트 테이킹'이라든지, '최고의 노트테이킹'같은 것도 없다. 내 통역이 잘 나왔으면 그 부분이 잘한 노트테이킹이다. 손보다는 머리를 더 많이 써야 한다. 그래서 노트테이킹은 속기가 아니라고들 한다. 물론 정보량이 많은 통역 같은 경우는 무조건 써놓아야 하는 것들이 많아 속기가 될 수도 있지만, 이때에도 손보다는 머리가 더 많이 움직여야 한다. 통역이 내가 쓴 내용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노트테이킹의 정석은 없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나도 아직 버거울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노트테이킹의 역할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보다 나은 통역이 나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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