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喰) 권하는 변태적 사회
술 권하는 사회는 이제 갔다.
어느 날 티브이 예능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았다.
소식하는 사람 둘셋을 앉혀놓고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소식하는 그들이 잘 먹지 않는다며 답답해하는 모습이 나왔고,
소식하는 사람들은 마치 죄인이라도 된 양 왜 먹지 못하였는지 변명을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정'을 중요시하기에 작은 콩 한쪽도 나눠먹는 것이 미덕임을 배워왔다.
그래서 그런 걸까. 우리네 조부모나 부모들은 먹을 것을 많이 만들어 이웃과 나누고, 적은 음식도 친한 이웃, 옆집에게 나누어주며 정을 확인했다. 게다가 농사를 짓는 문화 때문에 먹을 것이 없던 시절 힘은 내야겠다 보니 반찬 없이 쌀밥만 많이 먹었더랬다. 박물관에 갔다가 우리 조상님들의 밥그릇을 보고 놀랬던 기억이 있다.
먹을 것이 없던 시절, 새끼들은 조금이라도 먹여야 하는 것이 부모 마음, 그런 궁한 상황에 이웃이 고구마 감자 한두 개라도 나누어주면 당연히 감사하고 정도 느끼고 굉장한 유대가 느껴졌을 터.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흥부'처럼 돈도 없으면서 자식을 많이 낳아 입에 풀칠하기 힘든 그런 집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이야기다.(물론 있을 수도 있겠다.)
우리 아버지는 부족한 집안에서 11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셨다. 당연히 먹고살기 힘드셨을 테고, 우리를 낳으셨을 즈음에야 조금 어깨를 펴셨다.
"옛날에는 배가 불뚝 나오면 부자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배가 불뚝 나오면 그것은 미련하게 많이 먹은 것이다."
아버지의 이러한 철학을 밑바탕에 우리 가족은 늘 소신껏 자신이 '먹을 만큼' 먹으며 자라왔고, 별 탈 없이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성장과정을 지나왔다. (덜 먹어 덜 크지 않았다는 말이다.)
게다가 아버지는 생물학 박사, 일문학 박사, 철학 박사셨는데, 그래서 그런지 모든 것에 늘 배움의 자세셨고, 각종 영양에 대한 책을 읽으셨다.
우리의 식단에서 흰쌀밥은 탄수화물이고 이는 빵과 같은 밀가루 음식과 동일하기에 반드시 흰쌀밥을 많이 먹을 이유는 없고 골고루 먹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다. 또한 과하게 먹는 것은 불필요하다 하셔서 우리 가족은 늘 흰쌀밥이 주인공이 아닌 식사를 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우리 부모님은 자식들에게 먹는 것을 강요하지 않았다.
"못 먹겠으면 그만 먹어. 억지로 먹지 마."
내 나이 40 넘어 사회생활 17년 차, 결혼 생활 14년째임에도 나는 여전히 주변의 먹는 강요를 받는다.
밥을 매우 중요시 여기는 시어머니는 정작 당신은 거의 드시지 않으면서 며느리가 밥그릇을 가득 채워 먹는 것을 '보는 것'을 좋아하신다.
며느리가 반공기만 먹기라도 하는 날엔 기분이 상하셔서 말이 없으시다.
회사에서는 점심시간에 밥을 남기면 모든 직원이 다 듣도록 "밥 남기다니!! 밥 한 톨도 남기지 말아야지."라고 소리치는 직원이 꼭 있으며, 밥을 먹은 후에는 꼭 디저트로 빵을 먹어야 하고 입에 빵을 물고 있어야지만 '배신자'취급을 받지 않는다.
상대방이 밥을 남겼던, 밥을 먹다 뱉었든 무슨 상관이며 빵을 먹었던 먹지 않았든 무슨 상관이랴. 우리나라에서 전해 내려 오는 '정'으로 이어져내려 오던 문화가 이렇게 식을 강요하는 '변태적' 문화로 바뀌었다고 할 밖에.
각자의 기준은 그것이 무엇이든 분명히 다르고, 먹는 양이나 좋아하는 음식 등은 당연히 모두가 다르다. 그렇기에 먹고 말고를 정하는 것은 온전히 본인이어야 하고, 많이 먹는다고 적게 먹는다고 비난을 받을 것은 분명히 아니다. 상대의 식판에 밥을 더 담는 것은 분명 선을 넘는 행위이고 상대방의 결정을 무시하는 것이다.
먹으라고 권하는 것이 정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다시 생각해보길.
상대방이 기분이 나쁘다면 그것은 정이 아닌 변태적인 강요이고, 상대가 힘든 것을 강요하는 것은 고문이고 폭행인 것.
분명한 것은, 본인들의 기준으로 보았을때 상대가 적게 먹었다고 기분이 나쁘고 화를 내는 것은 '정'은 아니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