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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러 Jan 26. 2021

나도 그 마음 뭔지 알아

사랑아 은율해

아홉 살인 딸에게  제법 용기란 것이 생겨서 피아노 학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는 단지 앞까지 혼자 걸어온다. 학원에 데려다주는 것, 그리고 집까지 올라오는 엘리베이터 타는 일은 어쩐지 무서워해서 같이 해줘야 하지만 '육아 ing' 혹은 '껌딱지' 같은 단어를 상기하면 편도의 홀로서기도 반길만한 쉼표다.


때로는 중간 지점의 놀이터에서 전화를 해서는 '엄마 나 놀다 가도 돼?' 묻기도 한다. 밖에서 혼자 체류하는 것에는 별 두려움이 없다. 놀이터가 안전지대라서기 보다는 어린이라는 상대를 만나기 때문이겠지. 어제도 하원 하는 길에 전화해서는 쪼금만 놀고 가면 안되냐고 묻길래 이미 늦은 오후라 망설였지만, 아이이이잉- 귓가를 간지럽히는 기교에 넘어가 허락을 했다.


그러고 한참 뒤, 아무것도 모르고 내 할 일 하다 문득 시계를 보니 일곱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전화하니 받질 않는다. 다섯 번째 통화 버튼을 누르면서 겉옷을 들고 튀어 나갔다. 1월의 저녁이라 이미 어둑어둑했다. 불안감에 뛰었다. 채 못 벗고 나온 안경 안으로 입김이 뿌옇게 쏟아져 시야가 안 보였지만 전속력으로 달렸다.


놀이터에 다다를 무렵 어슴프레 딸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호덕였던 긴장이 풀어졌다. 반면 안도한 나와 달리 딸은, 걸어오는 나를 보며 얼어붙은 것 같았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큰일 났다'를 외치고 있었다. 그 마음이 너무도 보이니 난데없이 사랑스러웠다. 어린이라는 세계는 정말 가식이 없구나 느껴졌다. 순수한 결정체에 씩씩댔던 마음의 화도 누그러졌다. 어떻게 나오나 보려고 옆에 다가가 아무 말 없이 서 있으니 딸이 말한다.


- 엄마 운동하고 왔어? 왜 이렇게 땀이 나?


요 새침함을 보았나. 조용하고도 나직하게, 다음부턴 엄마 전화 꼭 잘 받고 놀이터에 시계 있으니 이따금씩 확인해야 한다 말해주고 함께 집으로 왔다.






밤에 잠자리에 누웠는데 궁금한 게 있다며 딸이 물었다.


- 근데 엄마, 아까는 왜 평소처럼 화내지 않았어?


끄응. 뭐지? 이 쫄리는 기분은? 갑자기 고해성사하듯 나는 답했다. 


은율이가 어릴 적에는

엄마가 회사를 다녀서

많이 놀아주지 못하는 미안함 때문에

되도록 화를 안 내려고 노력했는데


이제는 하루 종일

은율이랑 같이 지내다 보니까

엄마도 모르게 막 화를 내고 있더라?

근데 그러고 나면

밤에 은율이가 잠들고 나서

너무 후회가 되는 거야.


엄마가 다그치지 않아도

은율이는 뭘 잘못했는지 아는데

왜 화를 냈을까 싶어서.

그래서 이제는

화를 내지 않기로 노력해보자, 했지.


그러자 은율이 말했다.


- 나도 그 마음 뭔지 알아!


그러면서 덧붙였다.


- 엄마 오늘 일은 정말 미안해.


화 한번 참으니 얻어지는 감정이 예상외로 커서 심장의 진동이 깊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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