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들러 Sep 15. 2021

혼자서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


정오를 기점으로 작정하고 주방 일을 시작했다. 우선 마늘을 믹서기에 돌린 후 도마에서 좀 더 빻아 트레이에 소분해서 냉동실에 넣었고, 대파도 총총 썰어 같은 방법으로 정리했다. 점심은 딸이 좋아하는 콩나물냉국으로 하기로 해, 멸치육수를 냄비 가득 내었다. 간을 마친 육수는 통에 담아 냉장실로 보내고 콩나물을 삶아 물기 탈탈 턴 후 접시 한 켠에 옮겨 담았다. 육수가 시원해지면 콩나물 첨벙 하기만 하면 되게. 육수가 식어질 동안엔 울집에서 김치와도 같은 존재인 브로콜리를 데쳐 두었고 깻잎 60장쯤을 씻어 양념장 만들어 재어 두었다.


이 많은 일을 하는 동안 딸은 사진의 그림을 그렸다. 키쿠지로의 여름 ost를 무한 재생한 채로. 하필이면 무수한 꽃들 위로 누운 소녀를 그려, 싱크대에서 복닥이는 내게 10분 간격으로 와서 '엄마 나 이거 언제 끝나지? 언제 끝날까?' 엄살을 피워댔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내 일의 양만 하겠니. 역시 먼저 그림을 끝낸 딸은 심심하다며 방의 인테리어를 바꿔 보겠다 설쳤고 그것마저 끝내고는 추억의 애니메이션 <월 E>를 보기 시작했다. 그래 너는 방학이구나. 부럽다.


정확히 두 시간 반이 지나서야 주방 일은 끝났는데, 그 끝이 무색하게 늦은 점심을 차려냈다. 눈으로는 영상을 쫒고 입으로는 콩나물냉국에 밥을 말아 후루룩 먹는 딸. 이르케 놀고먹는 사람인데 밉지가 않으니 엄마란 참 괜한 게 아닌가 보았다.


오후 늦게는 아버님께서 전화하셨다. '요새는 그나마 덜 더워서 좀 낫제?' 하고 운을 떼신 아버님은 백신 꼬옥 맞아야 한다며 잊지 말고 예약하라 하셨다. 웬일로 전화신가 했다. 이야 아버님 저 백신 맞으라고 전화까지 주신 거예요 오올! 내가 푼수 떠니 민망하신지 서둘러 다른 말을 끄집어내셨다. 통화를 끝내고 나니 뭔가 뭉클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부동자세인 딸을 보면서, 내 삶 안에 깃든 가족의 영향력에 대해 생각했다. 어쨌든 나는 며느리 걱정하는 칠순 노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본연의 역할이라기엔 좀 그렇지만 어쨌든 주부의 일 말고, 쓰는 게 좋아서 쓰고 있다. 사실 좋아서 하지만 외롭다 느낄 때도 많다. 가식이라곤 없지만 자질구레 일상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뭐 얼마나 있을까 싶고 기실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읽어주고 마음을 나눠주는 고마운 사람들이 있기에 내 글은 앞으로도 계속 공개할 거다. 터놓고 써대는 온라인의 소통이 그나마 허전함을 덜 느끼게 하지 않나 싶을 때도 많으므로.


그에 반해 아직 온라인 친구가 없는 9세 어린이는 오랜만에 학원에서 만난 단짝과 놀이터에서 놀다 왔다. 얼굴이 벌겋게 익은 소녀를 마중 나가 함께 돌아오며, 맨날 붙어 다녀도 그렇게 매일 재미있니? 물었다. 의외로, 늘 좋은 것만은 아니라 했다. s랑 인형 놀이 같은 거 할 때는 맨날 싸우니까 하기 싫고 어떨 때는 문자를 너무 많이 보내서 귀찮다고도 했다. 하지만 이랬다. '그래도 그냥 같이 놀아. 친구니까.'  말에는 확신이 있어 보였다.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존재하는 우정의 크기를 딸은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이전 06화 한 여름밤의 소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