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병 안고 자는 강아지 인형이 어디에선가 불쑥 튀어나왔는데 베개도 없이 자는 게 안됐다며 딸이 클레이로 침대를 만들어 줬다. 동기부여란 이런 용도가 아닐 테지만 어쨌든 그 성의가 무색하면 아니 되므로, 순대볶음을 만들어 와인을 한 병 땄다. 하지만 고퀄의 꽐라가 되기에 자질이 부족한 나는 와인 두 잔에 핑그르르 돌아 아홉 시 무렵부터 꾸벅꾸벅 졸았다. 남편과 딸이 또 자냐면서 괴롭히길래 썽이 나서 양치만 겨우 하고 침대로 도피했다.
설거지 미루는 타입이 아니라 께름칙했으나, 혹여나 남편이 대신해줄까 내심 기대도 했으나, 역시 그런 거 바라는 내가 잘못. 그들은 침대에 눕기 무섭게 옆에 눕겠다고 몰려올 뿐이었다. 부녀가 서로 부대껴 나를 타 넘어 다니며 난리를 피우는 통에 머리칼은 엉키고 밟혀 괴성을 지르게 했고 가만히 누워 있었는데도 온 몸이 땀으로 범벅되었다. 아유 이 잉간들을 진짜!
열폭한 내가 삼중 발차기를 남편에게 쏟아붓고 또 한차례 깔깔 소리가 툭툭 쏟아진 뒤라야 야단법석은 마무리된다. 남편이 퇴장하고 딸과 둘이 되면 이제 자느냐. 전혀 아니지. 새로운 대화의 장이 열린다. 딸의 애착 인형 멜뚱이는 밤에만 목소리를 내는데 그 역할이 나다. 나이는 불명확하지만 어쨌든 딸이 누나다. 내가 누나, 누나 하면서 멜뚱이로 둔갑해 상황극을 펼치면 자기만의 방에서 비밀을 쌓아가기 시작한 아홉 살 소녀도 연기에 초몰입한다. 이럴 때 보면 참, 어린이는 어린이다.
한참 자는데 딸이 '엄-마' 조용히 불렀다. 와인 두 잔에 두통마저 생겼으므로 귀찮아 못 들은 척하다가 아무래도 신경 쓰여 왜?라고 묻자 '아니야.' 그러곤 다시 뒤척뒤척. 뭔데 왜 말해, 연거푸 묻자 '나 목말라.' 아까 급자기 눕느라 자리끼 준비하지 못한 것을 또 어쩌랴. 천근만근 몸을 일으켜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주었다. 벌컥 벌컥 벌컥. 탈탈.
거리의 청춘들이 데시벨 높은 소음을 내었다. 뭐라 하는지 발음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취기의 소리가 나 지금 신났어요, 외치고 있었다. '아니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저렇게 떠들고 있지?' 딸이 어른처럼 구시렁거렸다. 언능 자라, 내 한마디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가 안아줘, 하고 말했다. 가슴으로 그녀의 등을 안은 채, 한 팔은 팔베개를 해주고 한 팔로는 어깨를 토닥였다.
잠이 성큼 달아났지만 눈을 감으니 아주 오래전, 청춘의 내가 떠올랐다. 남들과 조금 다르게 행동하는 것이 그렇게나 희열이던 때 말이다. 죽치고 있다가 새벽에 나와서는 택시 안 잡힌다며 발 동동이던 때. 겁 보다 사랑이 고팠던 그때. 세월은 흘렀고 지금은 이렇다. 지극히 자연스럽게 계절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