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정하는 이름, 필명

조금 더 자유롭게

by 그냥출판사

"선생님 팔 아파요."

"손가락이 마비되는 거 같아요"

"다 채워야 돼요?"

"이 정도만 써도 돼요?"


초등학교 고학년 수업에서 쓰기의 비중은 꽤 크다.

교과서와 학습지에 자신의 생각이나 배운 내용을 빼곡히 써야 하고 많은 교실에서 일기나 세줄 쓰기 등 다양한 방식으로 글쓰기를 지도한다.


간편한 소통에 익숙한 아이들에겐 긴 글 쓰기가 즐거움보다는 부담감으로 느껴질 거다.

가끔 진득하니 신나게 쓸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넉넉히 시간이 주어져도 헐레벌떡 쓰는 모습이다.

아이들이 쓴 글들은 교과서와 학습지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다가 학년말에 버려지곤 한다.

학기말에 교과서들을 통째로 분리수거장에 버리는 날이 있는데

고3 학생들이 수능 끝나고 지긋지긋한 문제집을 싹 버리는 모습과 비슷하다.

그 모습을 볼 때면 내 글도 아닌데 꽤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할수록 아이들의 마음은 쓰기로부터 더 멀어지는 것 같았다.

원래 시켜서 하는 일은 더더더 하기 싫어지는 법이니까.

이쯤 되면 쓰기를 안 시키는 게 오히려 쓰기를 좋아하게 만드는 방법일 지도 모르겠다.




우연히 참여하게 된 글쓰기 모임에서 <스스로 쓰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들로 나도 그중 하나였다. 쓰는 것 자체는 어려움 투성이었지만 읽고 쓰면서 우리는 자주 울고 웃었다.

꼭 책을 내겠다는 목적이 아니어도 쓸 이유들은 넘쳤다.

회비를 내면서까지 매일 정성껏 글쓰기 숙제를 하는 어른들.

그들의 어린 시절을 상상해보곤 했다.


일상의 모든 것들을 글로 연결 짓는 습관이 생겼다.

그곳에서 우리가 서로의 글을 읽으며 따뜻한 댓글들을 주고받는 사이에 나는 쓰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그냥 쓰는 사람>이 된 것이다.


어떻게 그랬나 골똘히 생각해 보니 네 가지로 정리가 되었다.


1. 자기 얘기를 쓴다.

2. 같이 쓰고 서로 독자가 되어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칭찬을 해준다. 지적은 없다.

3. 필명으로 쓴다.

4. 그냥 계속 쓴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3번에 관한 이야기다.

그곳에서는 실명을 쓰기도 했지만 대부분 필명이었다.

인스타그램 아이디이거나 영어 단어, 별명 같은 것들.

그 필명들은 힘을 빼고 무심히 지은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같이 주인을 똑 닮아있었다.

작가의 우주.



어린이들도 필명을 사용하면 좀 더 재밌지 않을까?

아이들 입장에서는 조금은 더 자유롭게 글을 쓸 수도 있을 거다. 게다가 어린이들은 유독 캐릭터를 좋아하니까.








망그러진 곰 작가님 아니?


"귀여운 곰 그림이요? 봤어요."


망그러진 곰 @유랑작가님


작가님들 중에는 본명을 두고 새로 이름을 지어서 쓰는 분들이 있어. 왜 그런 걸까?


" 더 귀여운 이름이라서요."

" 내 마음에 드는 이름이라 좋아요."

" 마음대로 지을 수 있잖아요."

그렇겠네.


우리도 <○○한 ○○>으로 필명 정해 보면 어때?


뭘 묻나.

아이들은 벌써 작명을 시작한 표정들이다.


얘들아, 필명은 너희가 좋아하고 관심 있는 거나 너희를 닮은 걸로 정해서 마음껏 표현해 봐.


나는 A4용지를 한 장씩 나누어주고 1/2에는 캐릭터를 그리고 나머지의 1/2에 필명을 쓰도록 했다.


귀찮은 펭귄 작가님_일부러 한껏 귀찮은 듯 흘려 쓴 센스



어쩜 이렇게 자신을 잘 알고 있는 걸까.

갑자기 대단하게 느껴진다.

아이들이라 오히려 쉬운 걸까?

나는 며칠 걸릴 것 같은데.


이불덮는 치즈라니... 귀염 바퀴의 깜찍한 표정을 보시라
발레를 좋아하는 아이, 축구와 수학을 좋아하는 아이, 역시 웃긴 아이


스스로 정해 보는 내 이름, 필명에는 아이들의 정체가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한 명도 조용한 애가 없다.

모든 캐릭터들이 "나야, 나!"라고 외치는 것 같다.

있는 힘껏 자신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아서 보면서 뿌듯했다.



우리 반 작가님 스물다섯 분의 필명이다.


_하늘 깡아지

_감자칩 먹는 병아리

_이불 덮은 치즈

_양갈래 얼발이

_반반치킨

_책 읽는 강아지

_꿈꾸는 고양이

_이츠미 키위새

_구름 위에 다람쥐

_귀염 바퀴

_글 쓰는 백여우

_유연한 카피바라

_수학 잘하는 축구공

_힘쎈 원숭이

_시골에 간 만두

_살찐 호랑이

_여름이 너무 힘든 호랑이

_팝쿠TV

_씐나는 네잎클러버

_귀찮은 펭귄

_최선을 다한 슛

_밀덕 카피바라

_부산고

_졸린 카피바라 회사원

_책 모자 여우



그냥출판사 작가메뉴판


쓰는 즐거움이란 결코 '가르쳐 줄'수는 없는 어떤 것이 아닐까.

내가 모임에서 쓰기에 물들었던 것처럼 경험해 보면 빠져나올 수 없는 그 매력을 전하고 싶다.




+ 망그러진 곰은 원래 유랑작가님의 그림캐릭터인데 아이들에게는 쉽게 <망그러진 곰>을 필명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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