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얼핏 보면 엉망이지만

by 그냥출판사

작가님들의 글을 읽다 말고

학습준비물 주문 목록을 정리하고

수학 단원평가지를 빨간 색연필로 매기다가 서술형 채점에서 머리가 복잡해져

채점을 다 마치지 못한 채 나는 작가님들의 공책을 몇 권 챙겨 들고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왔다.


올해는 '작가님'으로 명명한 그들의 글을 자세히 보겠노라 마음먹었기 때문에 챙겨 들고 집으로 향한 것이다. 깜깜해지도록 학교에 남는 건 이제 좀 무섭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악필이다.

가뜩이나 노안이 온 나의 눈을 가늘게 떴다가 부릅떴다가 해가면서 봐야 내용을 제대로 알 수 있다. 기상천외한 맞춤법 실수들이 난감하면서 귀엽다.




저녁을 먹고 소파 한쪽에 앉아서 출판사 업무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귀찮은 펭귄>님의 글 차례다.


실제로 그림과 흡사한 매우 귀찮은 얼굴에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어린이.

약간 뚱한 표정으로 무심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글을 쓰면 한껏 귀찮은 글씨체와 다르게

여백 없이 꽉 채운 긴 글을 써내곤 한다. 뭔가를 할 때 남다르게 집중을 하기 때문에 금방 피곤해지는 걸까? 그는 늘 절전모드 같은 표정이다.

확대해서 자세히 보면 그가 '귀찮은 펭귄'이라는 글자는 글자체를 다르게 해서 강조한 것을 알 수 있다. 허허허. 귀찮지만 섬세한 펭귄님.


수업 중 나의 말에 아주 이따금씩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피식 웃음을 터트리거나 "아하~~"하고 반응을 하는 순간이 있는데 그게 뭐라고 나는 뿌듯함을 느낀다.

옛날이야기에서 웃지 않는 공주를 웃기는 데 성공한 셋째 아들이라도 된 것처럼 아주 기분이 좋다.

내가 교사로서 좋아하는 순간 중 하나이다. 아이들이 나에게 찐으로 반응하는 순간들.

나에게 개그본능이 있다는 걸 교사가 되고 나서 알았다.

하지만 수위를 잘 조절해야 한다. 우스운 교사가 되어서는 안 되니까.



귀찮다면서 제일 성실한 펭귀작가


<밀덕 카피바라>님은

다짜고짜 사인 연습을 한 흔적이 보이는데 북토크에서 사인을 할 걸로 예상했다는 의미일까?

그 점을 살짝 드러내는 계산된 연출이라면 너무 영리한 작가님이다.

비록 글은 짧지만 퇴고글에 사인까지 해서 마무리했다는 점이 감동적이다.

진지하게 상상했음이 틀림없다.

마지막 문장 끝 ♡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가님은 평소에 사랑꾼 면모가 있다 보니 필명이 밀덕이라는 게 좀 의외였다. 밀덕은 '밀리터리 덕후'의 줄임말이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전쟁에 흥미가 많다는데 역시 어린이들은 반전매력자들이다.

사랑과 전쟁에 모두 끌리는 그.




어린이 작가들이 이번 주제에 푹 빠져 글을 쓰는 모습들이 떠올라 읽는 내내 기뻤다.

역시 나태주 시인의 말씀이 옳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어린이 작가들의 글을 느리게 여러 번 읽는 동안 '잘 쓴 글' '좋은 글'이 무얼까 생각해 본다.

그들의 글은 완성된 한 편이라고 하기엔 형식적으로 어설프고 내용도 횡설수설인 면이 있다.

하지만 충분하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교사로서 이 상태의 글을 글쓰기 지도의 목표로 삼아서는 안된다.

성인이 되어서, 혹은 더 일찍 필력 있게 글을 쓸 수 있다면 그것은 삶의 무기가 될 테니.

국가교육과정 국어과 지도 목표도 글쓰기의 형식을 지도하도록 되어있다.

당장 중고등학교 서술형 수행평가나 대입 논술고사, 각종 글쓰기 과제에서는 독자입장에서 이해하기 쉽게 쓴 글이 좋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그런 글쓰기지도도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쓸모도 생각해 보자.

어린이라는 시기를 미래를 준비하는 미숙의 시기라고 보지 말고

어른과 같은 인생의 한 때로 본다면 그들이 생각하고 끄적인 모든 글들이 인생 자체로의 가치가 있다는 것.


내가 때때로 끄적인 메모들은 그 자체로 나에게 의미가 있다. 쓰는 그 순간 자체로 의미 있는 쓰기.

글쓰기는 그 순간을 오롯이 나로 살아있게 하는 매우 존재론적인 행위이다

나에게 깊게 집중하고 주의를 기울이는 순간이다. 요가나 명상을 하듯이.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나 자신에게 묻고 듣고 쓰는 행동.

누구에게 들려주려는 목적의 내용이 아닌 혼잣말 같은 것.

이 행위에 의미가 있다.

어린이들이 글쓰기 숙제를 하듯이 글 숙제를 했던 때가 있었다.

얼마나 완성도 높은 글을 쓰느냐와 별개로

어떻게든 내 얘기를 쓰기 위해 끙끙대는 시간들과 결국 마감을 앞두고 어떤 단어들을 선택하고 배열해서 문장들로 써 내려가는 과정 자체에 의미가 있었다.

내가 나에게 그렇게나 몰입하는 순간은 잘 없었던 것 같다.


<그냥 출판사>에서는 글쓰기의 이쪽 면에 더 관심을 가지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싶다.


이연실 편집자님은 <에세이 쓰는 법>에서

"편집자가 아니었더라면 결코 내 인생에서 만날 일 없었을 사람들의 신기하고 놀라운 이야기에 푹 빠져 한 시절씩을 살았다. 그들에게서 가장 아름답고 독보적인 점을 발견해 책에 담았다. 이 과정이 미치도록 재밌었다. "라고 쓰셨다.


초등교사가 아니었다면 내 인생에서 만날 일이 없었을 신기하고 놀라운 글들, 우습고 사소한 글들을 읽는다.

글을 쓴 본인들이 곧 잊을 테지만 그들에게 새겨져 있을게 분명한 아름답고 독보적인 어떤 것들을 발견해 나갈 수 있다니 감사하다.



우리 작가님들이 몰입해서 쓸 만한 주제들을 찾아야 한다.

까다로운 그들은 웬만해선 넘어오지 않으니.

어떤 방법으로든 어린이들이 쓰기에 빠져들도록 판을 준비해 주는 게 편집자인 나의 몫이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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