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빛나는 연극
1. 오늘의 문장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욕망이 만나는 장소“
-신용목 / 비로 만든 사람
연극을 위한 극장을 일컫는 말이 아닌데도 나는 짙은 밑줄을 긋는다.
나는 오늘도 극장에 왔다.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서둘렀다. 작년에 내가 출연했던 작품이기 때문에 벌써부터 마음이 약간씩 진동했다. 오래 살던 옛집에 다시 찾아가는 기분일지도 모른다.
낯선 시간이 자리 잡은 옛날 놀이터. 익숙한 그림자들이 서성이는 골목길. 흐릿해진 간판들. 그리고 여전히 실컷 굽어지는 담벼락. 나는 제법 산동네에 살았었기 때문에 자주 그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내 마음이 어디론가 좁은 골목길을 달려가며 한결 낡은 그림자들의 뒤꽁무니를 쫒는 느낌을 나는 받아 쓰곤 하였다.
결국 헤매다가 돌아섰다. 내가 살던 옛집 대문은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는 너무 멀리까지 달려왔기 때문이다.
이제 곧 막이 오른다.
내 연극 인생에서 몇 안 되는 명작 희곡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를 경청할 수 있어서 많이 설렌다.
희곡의 완성은 얼핏, 두 개의 욕망이 최고의 절정으로 만나는 일이다. 읽는 자의 욕망을 완성시키려면, 말하는 자의 욕망을 곱씹으며, 듣는 자의 자리에서, 각기 다른 색깔에 물들며 묵묵히,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 오늘의 연극
더블캐스팅을 보려고 다시 극장으로,
어제였다, 연극이 어떻게
영화와 다르게
어쩌면 도저히 추월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그 존재이유를 불태우는지
이토록 빛나네!
겉눈으로 실컷 울고
속마음으로 마냥 울었던 낮과 밤, 객석에서,
목이 꽉 막힐 정도로 슬픔이 치밀어 올라서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다른 손으로 허벅지를 꽉 쥐었습니다. 그렇게 끝까지 다 보았습니다.
사이,
모두가 잠든 새벽에 깨어났는데 남겨진 울음이 다시 복받쳤습니다. 그냥 내 감정을 나무라지 말고 내버려 두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희곡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가 오늘의 무대, 물빛극장에서 완성되었습니다.
모두 다 내 이야기입니다.
무관심한 사람
좋아하는 걸 좋아하다가
좋아하는 것만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것을 정말로 싫어하는 사람
강요만 했던 사람
외치던 사람
우격다짐하는 사람
후회하는 사람
이미 밤은 깊은데,
뒤늦은 사람
벌써 날이 밝아오는데,
고개 떨구는 사람
자신에게 소중하다고 여기는 부분을 향해,
앞으로만 돌진하던 사람
“미도리는 착한 아입니다!”
이 말이 온통 메아리칩니다. 마지막에 가서야 진심을 다해, 작가는, 그걸 말하고 싶었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당신도 죽지는 마!‘
그리고 나는 매번 조직에서 밀려났다. 내가 나를 밀어냈다. 안에서 밖으로. 바깥에서 안으로 돌진하며 쳐들어오듯, 늘 그랬다. 내가 주인이던 장소에서 이방인으로 돌변하였고, 정든 곳에서 갑자기 나는 부재중임을 자처하였다. 그래서 늘 경계도 없이 경계인으로 살고 있거나 아예 보이지도 않는 한 줄 경계선처럼 그어지고 있을 뿐이다. 나는 꼭 그렇다. 그것을 나는 부교합 내지는 불화라고 쓴다.
여기까지 메모를 하고 다시 길게 적습니다.
한 편의 희곡이 무대에서 완성을 이룩하는 풍경을 목격하였습니다. 내가 잘 모르던 감정의 마디를 눈으로 읽고서 나는 뜨거워진 마음을 분주하게 암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의 조건>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하느라고 시간이 흘러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내려야 할 곳을 지나쳐서 한참을 흘러가버리는 것처럼.
사람의 조건은 사람됨의 이유일 수가 있습니다. 무대 위의 배우도 매한가지입니다.
한 작품을 두 팀이, 너무 다른 질감의 배우들이 똑같은 극장에서, 똑같은 세트 속에서 등장할 때 우리는 무엇을 볼까요? 아니 무엇을 보아야 할까요? 그것을 질문하고 그 해답에 골몰할 수 있는 장소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더욱더 서로를 향하여 친절해져야만 하겠습니다. 우리가 목격한 그 모든 사람들은 벌써부터 있는 힘껏 자신과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플라톤이 남긴 말이라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나머지 쓰잘데기없는 것은 싹 지워버립니다. 내 이름도. 내 얼굴도. 내가 지녀왔던 무엇과 그 무엇을 둘러싼 그 무엇도. 다만, 우선은, 그러하길 바랍니다.
#니부모얼굴이보고싶다
#하타사와세이고 작
#정범철 연출
#지공연협동조합 기획제작
#물빛극장
#2023년11월8일-19일
이번에는 아쉽게 놓쳐도 괜찮습니다. 마법 같은 시간은 언젠가 다시 도래할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