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일인데,
어젯밤 꿈에 니 아부지가 나타나서 식사 아주 맛있게 하시고 나서 컬컬컬 웃으셨어,라고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그러게 좋아하는 음식 차려놓았으니 너도 절도 하고 얼마나 다행이니, 나도 인사도 하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 좋구나. 라고도 하셨다.
어머니 혼자 손수 마련한 애도의 방식이 당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린 것이라면 며칠 산란스럽던 어머니께서 오늘밤은 달게 주무시겠다. 참 다행이다.
어머니 원하시는 대로, 초와 향을 켜고 피우라 하면 나는 초와 향을 켜고 피웠다. 천천히 절 하라고 하면 천천히 깊게 절을 했다.
애도의 형식을 자기만의 방법으로 완성할 때에는 어떤 종교의식, 그 범주와 규칙을 다 넘어선다는 걸 나는 깨닫는다.
아버지는 개신교 장로를 지내셨는데, 제사상을 과연 좋아하실까? 이런 질문을 꺼내지도 않고, 오래 미뤄두었던 절을 하면서, 겉으로 드디어 소리 내어 발음했다. 아픔 없는 곳에서 편히 쉬세요 아버지 라고.
아픔이 없는 곳은 번민을 일으키는 마음과 육신이 없는 거기, 마음과 육신이 없고 호흡의 자취가 보이지 않으니 시간과 공간의 의미가 모두 사라지던 바로 그 순간의 연속, 비로소 영원의 세계 아닐까. 영원이란 산 자를 위한 버팀목인가, 오히려 죽은 이들은 염두에 둘 수조차 없는데도 산 자들은 매 순간을 겪어야 하는 통점이 바로 영원인 건가.
더 슬퍼하는 자에게 축복이 깃든다면, 슬픔으로 슬픔을 이겨내는 일이야말로 산 자들이 감당해야 할 일상이다 싶은데,
사진 정리하다가 죽은 아버지 누워 계시는 얼굴이 내 눈을 향해 육박하였다. 천천히,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던 그 순간에, 무언가 움키느라고 살살 흔들리는 걸 보니, 이런, 사진이 아니라 동영상을 나는 왜 찍었을까, 죽은 사람의 얼굴을 만지는 내 손이 아버지의 침묵을 건드리는데 끝까지 다 못 보고 그만 삭제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 서둘러 복원하고 핸드폰을 옆으로 치워두었다. 읽기 싫은 책처럼,
터무니없도록 슬픈 죽음을 노래하는 문장을 이제는 쳐다보기도 어렵지만, 오늘 동료 중에 또 한 사람 엄마가 하늘나라로 올라가셨다는 그 밑에다 나는 또박또박 적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기도 말고는 아무것도 할 게 없는 바로 그 순간,
아버지 당신의 몸에 매장된 침묵의 지문을 내 손바닥으로 옮기던 그날의 내 손을 잠시 쳐다보았다.
기일인데 아무런 일도 없고, 어떠한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밤이 내려왔을 뿐. 나는 맨 처음 만나는 오늘을 잘 공부하였다.
희곡 #링링링링, 대사 한 줄
2023. 2.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