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텅 빈 의자는 누구인가
이 연극,
금수우진전!
금수우진전에는 금수가 나오고 우진이 나온다.
금수는 날짐승과 길짐승이라는 뜻이며 사실상 모든 짐승을 말한다. 남의 은혜를 저버리며, 행실이 더럽고 나쁜 사람을 비유적으로 ‘금수만도 못하다’라 할지라도, 사람을 반드시 짐승에 포함시켜야 마땅하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니까 인간은 금수와 경쟁관계가 아닌 거다. 짐승은 인간이 되고 싶지 않을 거다.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여전히 모를 테니까. 그저 인간들이 자주 짐승으로 탈바꿈하는 일이 개가 문득 사람이 되는 일보다 더 일상에 가깝기 때문에 어쩌면 진화론의 숙명은 네 발보다 두 발로 걷는 인간에게 더 가혹하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 동물의 세계에 살고 있노라! 하고 탄식하던 낮과 밤이 얼마나 많았는가!
날짐승과 길짐승의 구별이 날개가 있고 없고의 차이인가, 아니면, 길이 있고 없고의 차이인가. 그게 없는 이에게 날개란 얼핏 오래된 자신을 찢어버리고 새로운 타인으로 돌변하고 싶은 욕망인가. 날개 없는 우리가 우리에게, 내가 너에게, 도착하기 위해서 바삐 달려가야 하는 길은 도대체 어디인 건지, 오죽하면 공중짐승과 땅짐승이라 하지 않고 날짐승과 길짐승이라고 했는지 골몰하다가 행길에서 발목 접지를 뻔하였다.
금수우진전, 이 엉뚱한 이야기 속에서 우주로 날아가는 꿈을 지닌 인간들은 우주를 진동시키는? 우주에 진동하는?, “우진”이가 많이 등장하는데, 우진의 곁에 하진도 있고 급기야 좌진이 있었으니 나는 그들의 운명을 직감하였다. 우리는 모두 어디론가 날아가고 싶어 하는 유전자를 타고났던 거다. 그게 천성이다. 우린 결국 어디론가 날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는데 살았을 때나 죽었을 때가 똑같다. 자기가 스스로 날거나 남이 날려 보내거나.
금수우진전에는 몇몇 금수들이 나온다. 날개가 있고 빛을 내고 있는 유일한 존재는 짐승 아니고 곤충이다. 반딧불이는 분명히 제 몸에서 빛을 발광하고 있는데, 반딧불이 이야기가 심상치 않은 것은 친구들끼리 몰려다니면서도 여전히 자신만의 단짝 친구를 찾고 있다는 비밀 누설에 있다. 조금은 다른 빛을 찾아 헤매던 반딧불이는 끝내 AI 반디에게 먹히는데도 역시나 그 관습을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인 걸 보니 내 거울 쳐다보듯 애처롭다.
호기심과 외로움의 우진-고양이, 자존감 있고 선한 우진-침팬지, 몸에 피 묻히고 지가 길들여지면서 남 길들인다고 착각하며 우진-늑대를 부러워하다 결국 개가 된 늑대, 도시 탈출을 시도하는 굶주린 우진-비둘기 두 마리, 어설픈데도 용맹한 북한 우진-두더지.
도무지 엉뚱한 이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갑자기 나는 울고 말았다. 내가 진짜 우진인데! 야~ 거기 누구야? 누구야? 하다가, “메아리 여기 앉자!” 하는데 갑자기, 화성으로 떠나버린 가짜 우진이들을 멀리 쳐다보려 애쓰는 리우진의 천연덕을 쳐다고서야 나는 깨달았다. 화성이란 누구인지, 어디인지, 남겨진 두 개의 텅 빈 의자는 누구인지, 무엇인지, 흩어지는 자취들은 누구인지, 왜 인지. 나는 내 방식대로 서글퍼졌다. 관객들이 나갔는데도 혼자서 서성거리는 그에게, 우진아! 나 여기 있어!라고 말하지 못해서 극장을 나오자마자 후회했다. 회한과 고독 속에 그 한 사람만 남겨두고 떠난다는 점에서 눈이 아팠다.
모두 떠났으므로 커튼콜이 없다. 연출의 설정이 그러하므로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밖으로 내달렸다. 서커스로 오는 길에, 포장마차에 들러 순대 한 접시 시켰는데, 마치 열흘 굶은 우진-사람처럼 입 속으로 마구마구 욱여넣고서 안 그런 척 씽씽 달렸다. 나도 화성으로 떠나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으므로. 맹렬하게 무엇인가를 끄적여야 하므로. 사랑하는 그대여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순간처럼 여전히 사랑한다네!라고 끝을 맺는 어떤 말들이 흩어지기 전에.
#금수우진전
#공상집단뚱딴지
수고하셨습니다.
수없이 들락날락하던 우진 여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