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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두 편 읽기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김경주의 시 두 편 읽기


<어느 유년에 불었던 휘파람을 지금 창가에 와서 부는 바람으로 다시 보는 일>


보는 일. 만나는 일보다 조금 더 가볍군요. 보는 일. 보는 일. 본다. 만나다. 만나다에서 어떤 집요함을 조금 빼놓은 느낌이에요. 문장을 소리 내어 읽을 때, 혹은 입속에서 아주 작은 소리로, 자신에게 속삭이듯 문장을 일으켜 눈으로 읽을 때, ‘만나는 일’보다 ‘보는 일’은, 조금은 더 경쾌한 기분이 들어요. 시인도 그러했을지 모릅니다.


시인에게 펼쳐진 풍경, 시인이 푹 빠져버린 풍경이 무엇일까 떠올려보는 순간이 즐겁습니다. 시를 산문으로 요약하는 일은, 시를 산문으로 풀어쓰는 일인가요? 시인의 눈에 새겨지던 풍경을 일일이 나열해 보는 즐거운 놀이, 말과 풍경의 놀이가 될까요?


시가 산문으로, 또 산문이 시로 변신하는 일을 자주 겪게 됩니다. 요즘 내가 그런 생각을 자주 한다는 의미예요. 그래서 시를 풀어쓰는 일은 시인의 풍경을 요약하는 일이 되겠습니다.


오늘의 시를 넉넉하게 요약하면,

어느 날 비가 오는데, 구름 속에서 바람이 많이 몰아치고 창가에 부딪히는 그 바람 소리가 마치 휘파람 소리처럼 들리던 날이었다. 그는 헌책방으로 가서 책을 몇 권 팔았고, 다시 낡은 책을 한 권 집어 들었는데, 거기에는 이전에 읽던 사람의 흔적이 많이 보였다. 밑줄 그은 문장들. 강조된 흔적들. 접힌 부분. 아예 찢긴 부분들. 그리고 마른 꽃 잎 한 장.


‘아무도 모르게 낡아가는 책을 펼친다 누군가 남긴 지문들이 문장에 번져 있다’는 말이 내 기억을 끄덕이게 했어요.  


‘비가 오면 책을 펴고 조용히 불어넣었을 눅눅한 휘파람들이 늪이 돼 있다’는 부분을 읽을 때, 내 마음이 풍경을 암송하기 시작했죠. 글 읽는 이들의 호흡, 숨소리, 말소리는 그 문장을 불며 발굴하는 일종의 휘파람일 수 있겠다 싶었죠.


‘작은 사원들 같기도 한 문자들이 휘파람에 잠겨 있다’는 문장은 야릇한 심정을 불러오네요. 작은 사원. 시인은 작은 사원을 언제 보았을까요? 책에서? 아니면 여행에서? 반면에 나는 작은 사원을 본 기억이 없어요. 사원, 이란 단어조차 낯설죠.


사막, 사원, 모래, 바람, 고원, 등에, 박쥐… 시인이 들춰낸 단어들입니다. 내 일상에서 먼 말들이죠.


시인은 헌책방에서 나와서 집으로 돌아왔는지, 아니면, 책방에서 문득 창문을 보았겠죠.


여기부터, 이야기는 제2막으로 넘어가는데, 유년에 불던 휘파람 소리를 기억해내고 있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도 등장하던 유년의 휘파람 소리를.


그리고 곧장, 몸 아픈 막내, 아버지의 탄식이 또 다른 휘파람으로 등장하였습니다. 아버지의 탄식은 격렬하게 고원을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유년의 밤 그리고 저수지, 싸늘하게 식어가던 부뚜막 그리고 차가운 한기를 다시 기억해 냈습니다.


누이, 나이 어린 누이가 이제는 성인이 되었고, 어려서 작은 소리로 배우던 그 휘파람 소리를, 내게 휘파람을 가르치던 누이의 딸에게, 이제 성인이 된 내가, 유년의 휘파람을 되돌려주고 싶어 합니다.  


어린아이가 불던 휘파람은 자기 키보다 작은 휘파람이라면, 어른이 되어 부는 휘파람은 멀리까지 몸과 마음을 떠나보내는 탄식인가요?


‘쇠 속을 떠난 종소리’, 란 표현도 좋고, ‘어떻게 손톱을 밀고 저녁이 되어 다시 돌아오는지’, 도 좋았습니다.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주는 듯, 아버지의 탄식은 길고 길었고, 그 숨은 깊고도 깊었고, 밤과 밤의 저수지로 향했다가 다시 저녁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쇠 속을 떠나갔던 종소리처럼, 따르릉 따르릉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돌아왔는지도 모릅니다.


이 부분은 앞에서, ‘책 속의 휘파람이 늪이 되고, 오래된 문자들이 휘파람에 잠긴다’에서 처럼 아주 강렬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김경주의 시를 읽고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우리 마음을 빛나게 하겠죠. 조용히 사유하는 습관을 길들이고, 사유의 진화과정을 꼼꼼히 되짚어보는 일, 우리 사유의 넉넉한 거기에다 천천히 길을 내고, 그 길이 쑥쑥 자라는 것을 우리가 똑바로 지켜보는 일일 거예요. 하루를 의미롭게 지내는 일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시, <눈 내리는 내재율>


“눈은 방마다 조용히 불고 있는 마을의 불빛들을 닮아가는군요”


이 문장이 좋았어요. 밤이 아니고 방이었어요. 밖에 내리는 눈이 방 안에서 불고 있는(?) 불빛들을 닮아가고 있다니, 이런 상상을 어찌할 수 있는지.


“눈들은 한 송이 한 송이 저마다 다른 시간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눈들을 한 송이 한 송이 가늠하는 일은 시인에게는 당연한 일인가 봐요. 저마다 다른 시간을 지녔다면 그것은 저마다 다른 사람의 눈(eye)과 눈(snow)이 서로 눈맞춤한다는 의미가 되겠죠. 우리는 ‘그 고요한 시간마다 눈을 맞추고 있는 것’일 테니까.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눈(snow)을 가장 그리워하는 것’이겠죠.


시인이 적어놓은 산문부터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역시 풍경을 요약하면,


눈 내리는 날 밖에 버려진 오래된 밥통, 거기에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인다. 얼핏 보니 숟가락 흔적이 있고, 밥통에 대한 연대기를 더듬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봄이 생각났다. 다가올, 이미 지나간, 그 봄.


‘눈들의 운율이 바닥에 쌓이고’, ‘숟가락이 지나간 자리 같은 것이 양은의 바닥에 낭자하다’


제 안의 격렬한 온도.

밥통의 연대기.

송진처럼 울울울  

밖으로 흘러나오던 밥물.

밥통의 오래된 내재율.


‘열이 말라가면 음악은 스스로 물러간다’ 이러한 연결도 좋았어요. 울울울 하던 밥물 터지는 소리를 음악으로 보았고, 밥통이 식어갈 때에는 음악도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


“새들도 저녁이면 저처럼 / 닿을 수 없는 음역으로 / 열을 내려 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몸의 열을 다 비우고 나서야 / 말라가는 생”


나는, 위 문장을 읽으면서 갑자기

<소리가 사라지고 열을 내린다>

<열이 있는 짐승들은 각자의 소리를 낸다>

<열이 내릴 때까지 사물들은 소리를 지른다>

라는 말을 떠올려서 메모하였습니다.


쥐와 쌀의 필연적 관계,

밥통에 새겨진 숟가락의 흔적,

그리고 하얀 눈이 지나가고

떠오르는 봄날은?


“봄은 … 밥물의 희미한 쪽이다”


이러한 상상력은 참, 시인을 시처럼 살게 하는 듯해요.


눈들의 운율,

밥통의 연대기와 오래된 내재율,

모두 합쳐서

눈 내리는 풍경의 내재율이 되었어요.


내 마음을 사로잡는 문장들이 나를 숨 쉬게 하였습니다



#나는이세상에없는계절이다

#김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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