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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집이다

장우재 희곡 1



“내가 이토록 사랑하는 희곡작가 장우재”


이 문장은 마치 감추고 감추었다가 마침내 고백을 해버리던 열아홉 청춘의 내 마음을 닮았고, 결국 말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일 거다. 그중 첫 번째 하나는 내가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하고 있다는 점을 이 세상에 박재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가 소설가도 아니고 시인도 아닌 참으로 희귀 동물 처음 보는 듯할 정도로 희귀한, 희곡 작가라는 점이다. 덧붙이면, 역시 내가 추앙하고 있는 배삼식 작가는, 왜 작가를 writer; 쓰는 사람이라고 하고, 왜 희곡작가를 playwright; 쓰긴 쓰되 쓰는 일이 장인정신으로까지 점철되는 사람이라고 어느 강연장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를, 장우재 작가의 희곡을 읽으면서 비로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 바로 그 희곡작가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사실에 나는 자랑스러움까지 느끼고 있다. 마지막 하나는 말하지 않으려다 어쨌거나 사실이기 때문에 말해버리는 말, 진짜 사랑에 온전히 몸과 영혼을 푹 빠트리려면 나는 아직도 한참 멀었다는 점일 거다.


오랜만에 장우재 희곡 <여기가 집이다>를 다시 읽고서 마음이 또 갈갈이 무너진다. 여기가 집이다는 여기 말고는 집이 아닌가? 를 꺼내온다. 여기도 집이면 안 되냐?라고 주장을 하다가 그럼 저기는 어디냐? 무엇이냐? 그것도 집이냐? 네가 꿈꾸던? 거기가 집이 아니면 거기에 머무는 너는 누구냐?라고 되묻는다.


<가족>이라는 말이 나오고 <가장>이란 말이 나왔을 때 무턱대고 나는 슬펐다.


왜 오늘도 어제와 똑같은 옷을 입고 나왔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다. 내가 어제랑 달라진 게 없어서라고. 하지만 어제의 내가 얼마나 형편없었는지는 바로 오늘 아침에야 밝혀진다. 오늘도 어제와 똑같이 나는 그냥 가장이 아니고 무책임한 가장이다.


나는 실내를 벗어나서 벽에 등을 기대고 쭈그려 앉는다. 7년 만에 동쪽으로 크게 바람이 불어 트로이를 공격하기 위해 출항을 하던 아가맴논 대왕하곤 사뭇 다른 나는 오늘 아침, 나는 끊어버린 지 7년째 되는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그리고 크게 한숨을 내뱉고서 어디론가 떠날 수 있기를 고대한다.


내가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다 읽은 책을 나도 다 읽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 사람이 다 읽은 책의 목록을 내가 다 수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서 나는 인터넷에 접속한다. 디지털 세상인데 당연하지 않은 것 중 하나는 이마저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접근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물리적으로도 접근을 못하는 이유가 딱 하나 있다면 물리적으로 접근하려면 접근하고자 하는 나 역시 보여줘야 하는 이유다. 내가 읽은 책의 목록까지 다 까야하는 부담이다. 하물며, 진짜 사랑을 하려면 그 사람이 쓴 글을 몽땅 다 읽어야 하는 까닭처럼 내가 끄적인 문장들도 가차 없이 까발려야 하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누군가를 다 사랑한다는 일은 완전히 불가능한 가능성이다.


‘가족과 가장’에 대한 나의 생각은 가능한 불가능성이므로 나는 오늘도 어제처럼 많이 아프다. 나는 가난한 사람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의 길은 가난을 견디고 살아가는 사람일 수 있고 가난을 모르고 지내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가난을 잘 모르고도 이렇게 오래 살아간다는 지점에서 곧바로 나는 가장으로서의 무책임을 발굴하고 있는 사람일 수 있다.


그러므로 어김없이 나야말로 <여기가 집이다>에 주로 등장한다. 나는 우선 최 씨이거나 최 씨 부인이거나, 양 씨이거나 양 씨 부인이거나, 신 씨일 때도 참 많았지만 아주 가끔 장 씨이거나 그러하다. 그런데 다행히 나는 이름 없는 큰 나무아래 앉아서 울고 있는 노숙자신세는 겨우 면하고 있나? 하는 안도가 스며들지만 여전히 나는 너무 아파서 그들의 말을 다시 들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게 바로 나이므로, 나는 다시 한번, 큰소리로 읽어볼 참이다.


나는 오늘도 이렇게, 내 삶의 하루를 시작한다. 입을 크게 벌리고 목을 휘휘 돌리고, 팔을 척척 뻗어보고, 누군가 이 가슴에 찾아오는 그 사람 젖은 눈빛에게 오늘의 행운이 깃들기를 바라면서.


두 번째날의 기적,

그 기적은 아직 이름이 없고

희곡 한 편 읽은 그 다음날 아침에

불쑥 시작되곤 한다.



#장우재 두 번째 희곡집

#환도열차 / 평민사 /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