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원의 출근일지 01
마흔을 앞두고 인생의 여섯 번째 퇴사를 말했다.
그리고 다음날, 출간 계약을 했다.
오랜 출간 준비 끝에 원고 작업을 염두하고 설레는 마음에 그토록 그리던 퇴사를 말하면 좋겠지만 그 정반대이다. 오랜 고민 끝에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더 이상 해볼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퇴사를 말했다. 그리고 다시 또 막막한 두려움에 사로잡힌지 채 하루가 되기 전, 뜬금 없이 그리고 갑작스레 출간 계약을 했다. 그것도 몸담았던 출판사에서, 그간 일했던 과정을 책의 주제로.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이 이해할 수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에는 K가 등장한다. K는 역량 있는 마케터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그리고 출판사와 컨설팅 브랜드 대표이다. 앞으로 먹고 살 걱정 없는 소위 말해 잘 나가는 사람. 출간 계약은 그런 K와 체결했다. K는 20년 가까이 알아 온 대학교 동기이자 인생 선배이기도 하다. K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약속 시간’이다.
'이른 아침, 집을 나서면서부터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허겁지겁 나온 탓에 수업 시작 시간까지 간당간당할 것 같다. 수업 시간을 늦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다른 것이 문제다. 잔소리.
“늦는 것도 습관이야.”
“이 작은 습관 하나가 인생을 결정하는 거야.”
K는 맞는 말만 한다. 나는 그 앞에서 똥 씹은 얼굴을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더 싫은 표현을 하기에는 내 인성에 문제가 있어 보이니 딱 거기까지 만이다.'
그의 인생은 비범하다. 아이돌 연습생을 준비했고, 발레리노를 꿈꿨으며, 어린 나이부터 다양한 사업 경험까지 했다. 조금 늦게 학업에 대한 열망이 생겨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진학했다. 학교 생활에서 그의 비범함은 여기저기 묻어나왔고, ‘약속 시간’은 그의 인생관을 가장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그의 ‘될놈될’ 태도였다. 돌이켜보면 K 또한 당시 20대 중반에 불과했는데..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가 그때부터 참 남달랐던 사람이었다.
나는? 인터넷 언론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매거진과 출판사를 거치며 비슷한 직종에서 경력을 쌓아왔다. 역량을 발휘해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끈 경험은? 없다. 성과도 구멍도 내지 않으며 평범한 직장인의 전형적인 길을 걸어왔다. 주도적으로 성과를 만들어 나가기보다는,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에 익숙한 그리고 그것에 만족하는 월급 중독자였다.
이 이야기는 나와 K의 이야기다.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나의 실패 이야기, 그리고 동시에 K의 성공 이야기다. K와 나는 같은 대학교 같은 과를 나왔으니 적어도 사회에서의 출발지점은 비슷했다. 그런데 지금은(이 프롤로그의 작성 시점은 K 회사의 마지막 월급일 전이다.) 내 월급을 주는 사람이 K다. 나는 그 월급을 받기만 하는 사람이었고.
그럼 나는 그에게 무엇을 주었냐. 내 시간을 급여의 댓가로 주었고, 더 크게는 내가 생각하고 상상한 모든 것을 K에게 주었다. 영혼까지 주었다고 할까. K는 내게 이 노예 생활을 빨리 벗어나라고 조언해주었지만, 나는 끝내 그 고기잡는 법을 익히지 못했다.
그러면 이 이야기를 왜 쓰냐. 사실 퇴사를 결정하고 가장 처음 드는 생각은 ‘어디 사람 없는 곳에 가서 몇 달 간 쉬어야겠다’였다. 그동안 인생을 받쳐 열심히 일했고, 지금 이 시점에서 나는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인생을 갈아넣은 이 시기에 대한 댓가로 ‘나만의 퀘렌시아’를 찾을 작은 시간 정도는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마음 속에 작은 불편함이 말했다. ‘정말 당당하다면 그렇게 해도 좋아.’ 선뜻 결정을 하지 못했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난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걸까? 무능력한 지금의 나에겐 잠시의 쉼도 사치일까?
답은 분명했다. 정답을 알고 있었다. 내 미래가 뻔히 보였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을 뿐.
'2~3달 간 해외여행을 다녀온다. 즐기지 못했던 자전거 여행까지 다녀온다. 경력에 맞는 회사를 알아보고 그 조건에 맞는 회사에 다시 입사한다. 그리고 남은 시간을 반복한다. 냉정한 현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상상했던 삶과 다르니 여전히 남 탓, 나라 탓, 정치인 탓만 하면서 계속 반복 또 반복한다.'
도피 여행은 3개월 후에도, 1년 후에도, 3년 후에도 언제나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그러면 바로 지금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떠남’이 목적인 단순한 쉼의 여행 말고 지금까지의 나의 선택을 돌아보며 앞으로 인생의 설계를 다시 한 번 해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딱 이 결심까지만 했을 때 K가 물었다.
“이제 뭐 할거야?”
대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졌고, 위에 언급한 것처럼 ‘출간 계약’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평범한 직장인이 할 수 있는 모든 실수를, 이름만 들으면 아는 우리나라 각개 각층 탑티어 작가들을 대상으로 저지른 이야기. 이게 이 책의 소재, 그 안에서 나와 K의 너무나도 다른 정반대의 관점과 행동 방향이 이 책의 주제이다.
실패 이야기를 하며 ‘저 이만큼 노력했으니 알아주세요’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의 실패 이야기를 궁금해 할 사람도 없거니와 굳이 그 이유를 설명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비교에서 오는 자극에 익숙한 사람들 아닌가. 모든 상황에서 마치 짠 것처럼 K와 나는 반대의 의사결정을 했고, 정반대의 인생 목적지를 향해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 나갔다. 비교를 하니 그 경로와 그 시간들이 주는 메시지는 더욱 명확했다.
비교를 통한 인생 경로만큼이나 더욱 명확해진 것은 이 이야기를 완성해 꼭 책으로 출간하겠다는 결심이었다. 이것조차 못한다면 앞으로 그 무엇도 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 과정을 통해 인생이 한 번에 ‘짜잔’하고 바뀌었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건 거짓이니까.
감사하게도 내게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고, 그 마지막 기회를,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한 가지를 작은 성공 경험으로 바꾼 이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이 작고 소중한 경험이 내 인생을 바꿔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무능력 퇴사자와 작가 사이에는 단 하루의 시간만이 존재했으니까.
내가 배우지 못했던 이유는 K와의 대화를 통한 고개 끄덕임에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닌, 엉덩이 붙이고 직접 내 글을 쓰는 과정을 통해서만 알 수 있던 것이었다. 무엇을 할 때 행복했는지 불행했는지, 어떤 상황에서 편했는지 불편했는지, 어떤 선택을 할 때 기대와 희망에 부풀었는지, 또 나락으로 떨어졌는지. 이미 답은 다 나와 있다. 여유의 시간을 포기하고 고통의 시간을 선택한 이 불편한 결정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그리고 마지막 선택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한 가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불편한 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