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발머리를 한 여자아이와 남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전시실 안으로 뛰어 들어온다. 엄마는 뛰지 말라고 타이르지만 서로 먼저 보려고, 습도를 체크하고 입구를 지나던 나를 휙 지나간다. 마침 나이에 따라 어떤 유물에 관심 있는지 고민하던 중에 아이들을 따라간다.
전시실 중앙에는 독립장 세 개가 놓여 있다. 10번, 11번이라 관리 번호를 둔 독립장에는 환두대도를 비롯한 삼한 시대 무덤에서 나온 칼들이 놓여 있다. 그 옆 12번에는 목걸이와 팔찌가 광섬유 조명에 반짝이고 있다. 뛰다시피 걷던 여자아이는 12번 독립장에서 멈추었다. 남동생은 누나 옆에서 11번에 놓인 화려한 긴 칼에 감탄한다.
대각선으로 7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노부부가 조금은 소란스러운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다. 조금 전까지 그분들이 보던 곳은 삼한 시대 대형 무덤을 실사모형(diorama)으로 재현한 곳이다. 낮은 철제 펜스가 있고 발밑 아래에 크기가 다른 무덤 모형 3개가 배치되어 있다. 그 맞은 편에는 아이들을 따라오던 젊은 부부가 벽부장에 진열된 토기와 설명판을 번갈아 보며 소곤거리고 있다.
박물관 전시실에 흐르고 있는 시간을 거리로 나타내면 얼마나 될까? 과학적으로는 말이 안 될 것 같은데, 문학적으로는 상상할 수 있다. 구석기시대 유물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지역도 있으므로 출발 시점을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가 출현하는 기원전 5000년 전으로 설정해 보자. 종점은 해방을 전후한 1945년 혹은 고고학에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의 기준으로 삼는 1950년(BP:Before Present)으로 두자. 합하면 약 7000년이다.
실현 불가능한 가정이기는 하지만 성인이 평균 시속 4km로 매일 10시간씩 7000년을 걸으면 약 1억 2백 만km가 나온다. 지구와 달의 평균 거리인 38만 4천km보다 훨씬 멀며, 태양에 이르는 평균 거리인 1억 5천 만km(1AU)보다는 적다. 만약 매일 15시간 걸으면 1억 5천 3백 만km가 나와 비슷해진다.
한국사 전체를 품은 거대한 국립중앙박물관과 다르게, 시・군의 역사를 주제로 하는 지방 박물관들은 보통 선사시대에서 근・현대 시대까지 긴 시간을 제한된 공간에 보여준다. 작은 공립박물관인 경우 상설 전시실의 동선 거리(movement distance)가 입구에서 출구까지 채 50m가 되지 않기도 한다. 학예사(curator)는 신석기시대부터 7000년, 구석기 유물이 있으면 몇 만 년 이상의 시간을 50m 안에서 전시해야 하는 압박감을 받는다. 7000년의 시간을 1억 2백 만km로 비유해보았지만, 50m 안에 이 길이를 압축해서 담아야 한다.
학예사는 상설전시실을 관람객에게 선보이기 전에 시대별 전공 교수를 포함해 여러 분야 전문가의 자문을 받는다. 그래서 전시는 한 지역의 역사를 상징하는 최고의 유물로 구성된다. 비록 현재와 멀어질수록 파손된 것들이 많지만 역사적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학예사는 전시를 구성해가면서 유물 하나하나와 깊은 교감을 가지며, 깨진 작은 조각에 불과한 유물이라도 관람객에게 ‘너의 참모습을 보여줘’라고 주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