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인과 촌장 Jul 11. 2021

귀농 팔 년, 농사 아닌 일로 농사를 메꾸고

농사를 계속 짓기 위한 새로운 생활

따서 판매하는 것보다 버리는 게 더 많았던 지난해 농사의 여파는 작지 않았어요. 귀농했을 때 초등학생이었던 산이는 어느새 고등학생이 되어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는데, 중학교 때까지 들어가지 않던 학비며 기숙사비도 우리에겐 만만치 않았고, 곧 다가올 대출금 원금 상환도 걱정이 됐어요. 제가 프리랜서로 논술 원고를 쓰면서 밤낮으로 일했지만, 농사지어 나오는 돈은 없는데 들어가는 돈은 많으니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했어요.      

그리하여 남편은 계속 농사를 짓고, 저는 직장을 다시 다니기로 했어요. 지역에서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다면 좋았을 테지만 경력을 살릴 수 있고, 연봉도 어느 정도 보장이 되는 직장을 지역에서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어요.

젊지 않은 나이에 직장 경력이 단절돼 있던 상태에서 주중에는 서울에 사는 동생 집에 얹혀서 출퇴근하다가 금요일 저녁마다 집으로 내려와 농사일과 집안일을 하는 생활을 하게 된 거예요. 저에게도 쉽지 않은 생활이었고, 남편과 아이들에게도 쉽지 않은 생활이 시작된 거지요. 그렇게 어렵게 주말 가족 생활을 시작한 건 농사를 계속 짓기 위한 거였어요.     

농사만 지어서는 농사를 계속 지을 수 없으니, 농사가 아닌 다른 일로 돈을 벌어 농사에 들어가는 돈을 대거나 농사로 인한 손해를 메꾸어야 하는 현실. 부정하고 싶지만 우리가 맞닥뜨렸고 해결해야 하는 현실이었어요.

처음부터 우리에게 열정과 신념 대신 큰돈이나 자본이 있었다면 이렇게 농사를 어렵게 부여잡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귀농 팔 년 차에 주말 가족 생활을 시작한 것도 잘한 결정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저 그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됐기 때문에 주어진 여건 속에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취해 보았고, 최선을 다해 문제를 해결했어요.     

남다를 것 같은 생활도 날마다 쌓이면 일상이 되더라고요. 새로운 일상 속에서 그래도 희망을 가져 보려 애썼던 기록들이 남아 있네요.        


  


2019년 6월 어느 날 일기 _주말 가족이 된 지 삼 주째     


이번 주말엔 이 주 만에 집에 내려왔다.

이 주 전, 우리 집 마당은 볍씨를 뿌려 놓은 모판을 깔아놓고

부직포를 덮어서 스프링클러로 물을 뿌려 대느라 분주했는데,

이 주 만에 볍씨가 모가 되어 있었다.      

쑥쑥 자라난 모를 보고 있자면,

여린 것들이 어쩜 이렇게 힘차게 자라날까

기특하고 신기하다.     


이 주 전, 마당 텃밭에 심어 놓은 해바라기는

터져 나오려는 꽃잎을 꽁꽁 싸매고 있는 것 같더니

이 주 만에 해를 바라보며 꽃을 피웠다.     


추운 겨울엔 알도 낳지 않던 닭들은

더운 여름에 열심히 알을 품고 있다.     


 이 주가 지나서 집에 오면 

밀린 빨래와 청소를 하고 농사일도 도와야 할 테지만

모는 더 많이 자라 있을 테고

어미는 달걀이 아닌 병아리를 돌보고 있겠지.     

보름 남짓 시간은 짧은 것도 같지만 

많은 것이 자라고 

많은 풍경이 달라지는 시간이다.     


토요일에는 농민회에서 여는 통일쌀 보내기 손 모내기 행사가 있었다.

어르신들 틈에 끼어 난생처음 손 모내기를 한 솔이.

솔이에게는 보름 만에 엄마랑 함께한 주말이 

후딱 지나갔을 것 같다.


얼마 동안은 우리 가족 주말이 

분주하고 애틋하겠지.     


그리고 보름마다 우리 가족도

파릇한 모처럼 노란 해바라기처럼

쑥쑥 자라 있을 거라고 믿는다.          





2019년 8월 어느 날 일기 무화과를 딴다     


무화과는 뜨거운 여름에 익는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날마다 따야 한다.

깜깜한 새벽에 랜턴을 끼고 작업을 시작해서

아침 열 시가 넘어가기 전까지 따야 한다.


해가 높이 뜨면 하우스에 들어갈 수조차 없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주르르 흘러내린다.     


더운 여름,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땀을 줄줄 흘리며 무화과를 따는 건

스스로를 배신하지 않기 위한 일이기도 하고     

우리를 알고 있는 누군가를 실망 시키지 않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올해도 우리는 애를 쓰고 있다.     

무화과가 빨갛게 익었다.


우리는 빨갛게 익은 무화과를 딴다.

오래 유통하려고 익지도 않은, 시퍼렇고 단단한 무화과를 따지 않는다.

익은 무화과를 따면 따면서 버리는 게 많고

조심조심 다뤄야 해서 신경 쓰이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말랑하게, 빨갛게 익은 무화과를 딴다.     


올해도 벌레 피해는 있고 

여전히 버리는 게 적지 않다.

그렇더라도

스스로를 배신하지 않고

우리를 알고 있는 누군가를 실망시키지 않기.

그걸 지켜나가기!     


오늘은 택배 고객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난해까지는 남편이 무화과를 따고 제가 포장을 했어요. 

홈페이지로 개인 주문을 받고 택배 보내는 일도 제가 했지요.

그런데 올해부터는 남편이 무화과를 따고

포장하는 일은 동네 일하는 분을 구해서 하고 있어요.

주말에는 제가 잠깐 돕고요.

남편이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택배 보내는 일은 손 가는 일이 많답니다.

날마다 택배 주문에 따라 물량을 맞춰서 따로 포장해 두었다가

종일 에어컨 바람으로 예냉을 시켰다가 아이스팩과 아이스박스 포장을 해서

가장 늦게 출발하는 택배회사 사무실에 갖다주는 일까지요.

남편 혼자 농사일을 하면서 택배 주문과 발송까지 하는 게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요.

그래서 당분간은 생과 택배 주문을 받지 못할 것 같아요.

우리 농장이 더 커져서 함께 일하는 사람도 많아지고 하면 좋겠네요. 그런 날, 오겠지요?’     


미안하고, 또 슬펐다. 

우리 농사가 이렇게 쪼그라드는 건가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해야지. 

더 좋은 날을 만들기 위해서 잠깐 물러나는 거라고 생각해야지.               



2019년 9월 어느 날 일기 비님 오시네     


더운 여름이 어느새 훌쩍 지나 버렸다. 추석도 지나 버렸다.

8월 중순부터 한 달 동안은 무화과 수확도 가장 많고,

추석 선물 포장할 일도 많아서 주말마다 집에 내려와서 정신없이 보냈다.     


새벽에 무화과 따서 포장하고 무화과 썰어 말리고,

잼이랑 식초랑 말린 무화과랑 선물세트랑 포장하고

추석 연휴에는 판매장을 빌려서 직접 판매까지 했다.     


농사일이란 게,

눈에 보이는 것마다 다 일이고

일 하나 끝내고 뒤돌아서면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는 일들이라

주말에 집에 내려오는 게 겁날 정도였다.     


추석이 지나고 이번 주는 한숨 돌리려나 했는데

비가 또 이렇게 많이 온다.

주말 내내 비가 잠시 그치지도 않고 내리는 바람에

빨래를 해서 말리지도 못하고

현풍까지 가서 건조기로 빨래를 말려 와야 했다.     

날마다 무화과 따서 담는 노란 바구니를 씻어서 햇빛에 말리는 일도

비가 오니 번거로운 일이 되어 버린다.     


하우스에 비가 들어차지 않을까,

수로가 막히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들어가 본 하우스 안에는

빗소리가 시끄럽다.     

하우스 안에서 듣는 빗소리는 

우산 아래서 듣는 빗소리와는 다르다.

비닐 하나로 하늘에서 쏟아지는 굵은 빗방울을 막는다는 건

힘겨운 일이다.     


무화과 열매는 가지 맨 아래쪽에 달린 것들부터 차례대로 익는다.

지금은 빨갛게 익은 열매가 가지 중간쯤 달려 있다.

이제부터 열매는 더 천천히 익을 거다.

아침저녁으로 날이 쌀쌀할 때

무화과는 가장 맛있다.     

바빴던 여름 동안 우리 가족 모두가 애썼다.

날마다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 무화과를 딴 남편,     

주중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내려와 밀린 집안일과 밀린 농장 일을 한 나,

그리고 잼 포장 박스를 접고, 식초 스티커를 붙이고, 무화과를 썰어 말릴 때 예쁘게 판에 놓는 일을 도와준 솔이,

기숙사 고등학교에서 주말마다 집에 와서는 집 청소와 밥 차리기를 도맡아 한 산이.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생활에 얼렁뚱땅 적응해 버렸다.

닥친 일들을 해내고,

저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가족과 일상에 더욱 감사하면서.     

월요일부터는 비가 그치고

바구니를 햇빛에 말릴 수 있겠지.

너무 갑자기 추워지지만 않으면 좋겠다.

맛있는 가을 무화과를 오래 먹을 수 있게.     

이전 08화 귀농 칠 년, 열매를 버리던 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