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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과 촌장 Jul 11. 2021

귀농 구 년, 우리에게 남은 것은

별일 없으면 좋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아무 사고 없이 일상이 이어지는 것만큼 복된 일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해를 넘기자마자 남편이 왼손 엄지손가락을 다쳤어요. 그냥 좀 긁히거나 한 게 아니라 뼈가 부러졌어요.

사다리 위에 올라가 전기 드릴로 나사 박는 일을 했는데, 왼손 엄지손가락 장갑이 돌아가던 전기 드릴에 말렸다고 해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잡아매고 병원에 갔더니 뼈가 부러졌다고 하더래요.

아빠가 전기 드릴 작업을 하는 동안 사다리를 붙잡고 있던 솔이는 아빠가 다쳤다고, 회사에서 일하고 있던 제게 전화를 해서 전해 주었어요. 근무 시간에 전화한 적이 없었던 아이가 전화를 했으니 저 또한 깜짝 놀랐지요. 그런데 솔이가 너무 침착하게 이야기를 해서 그게 마음이 더 아팠답니다. 엄마와 떨어져 있는 동안 아이는 스스로 더 어른스러워지려고 애쓰고 있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남편은 다친 엄지손가락에 깁스를 했고, 뼈가 제대로 붙지 않으면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해서 걱정이 컸어요.

다친 것도 다친 거지만, 손가락 하나 다친 게 아주 큰일이더라고요. 

엄지손가락 하나 못 움직일 뿐인데 글쎄,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어요.

농사일은 제쳐두고라도 세수도 못 하고 손도 못 씻어요. 옷 갈아입는 것도 밥 먹는 것도 잘못해요. 

코로나 때문에 학교에 안 가고 집에 있게 된 산이가 삼시세끼 밥을 차려야 하고 솔이는 아빠 손을 씻겨 주어야 했어요. 저는 다른 주말보다 반찬을 더 많이 해놓고 왔어요.

코로나 때문에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새삼 느꼈던 그때, 우리 가족은 또 다르게 더 절실하게 느끼고 되었어요.

코로나 때문에 온 나라가, 모두가 힘든 와중에 남편은 다쳤고, 애써 지은 농사도 떠올리기 싫은 이태 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기대에 미치지 못했어요. 그래도 우리만 힘든 건 아니니까, 모두가 힘든 때니까 또 견디고 넘어갈 수 있었던 같아요. 날마다 해마다 한 고비를 또 넘고 넘으며 우리 가족의 새로운 일상과 귀농 일기가 또 차곡차곡 쌓여 갔어요.     


2020년 6월 어느 날 일기 저마다 기다리는 것들    

 

봄날에 밀밭에서 아빠와 아들은 밀밭을 밟아야 한다면서 뻥뻥 공차기를 했다. 

벌써 몇 달 전, 봄날의 일이다.     

봄날, 우리 집 마당에서는

목련나무도, 영춘화도, 병꽃나무도, 복숭아나무도

모두모두 꽃을 피웠다. 


봉오리였다가 다음 주말에 가서 보면

꽃망울이 터져 있고

또 다음 주말에 가서 보면

꽃잎이 활짝 벌어져 있고

또 다음 주말에 가서 보면

어느새 꽃잎이 져 있고…….     


어느새 폈다가 져 버리는 꽃처럼

봄날을 지나며

농장도 꽃 못지않게 분주했고

지나는 시간이 아쉬웠다.    

   

4월이 오기 전에 겨우내 무화과나무를 덮어 두었던

솜이불을 걷어 주어야 했는데

엄지손가락 뼈가 부러져서 두 달 가까이 깁스를 하고 있어야 했던 남편은

동네 농부들한테 이불 끌고 마는 힘든 일은 다 시키고

본인은 트랙터 레버를 까딱까딱 움직이며 

걱정하던 큰일을 겨우겨우 끝낼 수 있었다.      

엄마 껌딱지였던 솔이는 이제 아빠 껌딱지가 되었다.

아빠 옆에 붙어 아빠 흉내내기에 재미를 들였다.

코로나 때문에 좋아하는 학교에도 못갔던 

솔이는 그 재미로 심심한 봄날을 견뎠다.     

솜이불을 걷어내고 돌돌 말아 쌓아 두고 나면

그때부터 무화과나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라난다.     

겨울 동안 잠을 자던 무화과나무들은


봄이 왔는지

알려 주지 않아도 

안다.      


봄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초록 싹으로 터져 나온다.     


저절로 꽃이 피고 새잎이 돋는 동안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하는 일도 해야 했다.     


장작을 때서 불을 피우고 솥 가득 물을 끓이고

망에 볍씨를 담아서 

팔팔 끓였다가 온도를 맞춰 식힌 물에

볍씨 담은 망을 넣고 5분 동안 흔들어 댄다.

찬물에 씻고

깊숙이 저어 둥둥 뜨는 나락을 건져 내고

모판에 볍씨 뿌리고 모판 펼쳐 놓는 일까지.

내가 함께하지 못했던 일들이 듬성듬성 빠져 있다.     


스프링클러를 설치해 놓고

날마다 하루 몇 번씩 물 주면서

모를 키운 날들이

내게는 듬성듬성했지만

남편에게는 촘촘했을 것이다.     


모가 부족할 것 같아

나중에 또 한 번 볍씨를 뿌렸다고 하고

며칠 앞선 모가 쑥쑥 자라고

늦게 뿌려진 볍씨는 때를 기다린다.     

싹을 틔울 때,

꽃을 피울 때,

줄기를 세울 때를 기다리느라

봄날은 분주하다.     

텃밭에 심어 둔 모종도 몇 주 안 지나

잎이 커졌고

잡초는 여지없이 아주 잘 자란다.     

마당 복숭아나무에 꽃이 지고

벌써 복숭아 열매가 달렸으며

싹이 터져 나왔던 무화과 나무는

가지가 사람 키만큼 자라

초록 열매가 맺히고 있다.     

듬성듬성해 보이지만

촘촘했던 봄날들.

벌써 여름으로 넘어와 버렸다.     

지칠 만큼 분주한 여름날 이야기도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솔이와 솔이 아빠는

주말을 기다린다.

다가오는 주말에

솔이 아빠는 하우스에 설치할 끈끈이 트랩을 잡아 줄 어설프나마 만만한 보조 일꾼을,

솔이는 미루고 미루었던 치과에 같이 가 줄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     


봄날은 여름을 기다렸던 걸까?

저마다 누군가가, 때가 오기를 바란다.


저마다 기다리는 것들이 있다.

퇴근 시간을 기다리는 회사원과

가을 수확을 기다리는 농부와

주말에 만나는 엄마를 기다리는 아들과

서로를 기다리는 가족.     

주말을 기다려 밀린 일기를 더 촘촘히 써야겠다.               



2020년 8월 어느 날 일기 무화과는 따고 있지만      


과일은 그해 맨 처음에 나는 첫물 열매가 가장 크다.

무화과 열매도 마찬가지다.

무화과는 가지 맨 아래쪽에 달리는 열매부터 먼저 익는데,

가지 맨 아래쪽에 달리는 첫 열매가 가장 크다.

그래서 무화과 수확을 시작하고 한 달가량은

열매 크기가 너무 커서 열매 여섯 개용 포장 상자에 맞춰 담지를 못해서 고생을 하기도 한다.     


하우스 무화과는 노지 무화과보다 한 달가량 일찍 수확이 시작된다.

올해도 벌써 7월 중순부터 무화과 열매가 익기 시작했다.

무화과 열매는 날마다 익어가고 있고

또 날마다 새벽에 따고 있지만……,

따낸 무화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작년처럼 재작년처럼 여지없이 올해도 벌레 피해가 생겼고

벌레 피해가 가라앉을 때까지 두고 봐야지 했는데

주룩주룩 비가 쉴 새 없이 쏟아졌고

우리 하우스 골에도 물이 차올랐다.

펌프로 물을 빼내고 나서 며칠 지나서

또 물이 찼고, 또 물을 빼냈다.

그러고서도 비가 그치지 않으니

땅은 물을 한껏 머금고 있고

물을 한껏 빨아들인 무화과 열매는 한참 싱거워졌다.     

원래 무화과 농사는 물 관리가 관건이다.

물을 너무 많이 주면 크기만 커지고 맛은 없어진다.


그런데 비가 쉬지 않고 내리고 있으니

물 관리를 할 수가 없다.

해가 나지 않으니 열매는 시퍼렇고

날씨가 습하니 무화과에 금방 곰팡이가 핀다.

그렇다고

무화과 열매를 따내지 않으면

초파리가 끓어서 안 된다.     

텔레비전 뉴스에 논밭을 갈아엎는 농부들 모습이 나올 때면 

저 아까운 것을 왜 저러나, 그냥 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할 테지만

농사를 지어 보니 알겠다. 그 마음을.

일 년 동안 농사를 지어서 수확을 하고 출하를 해야 하는데

내다 팔 수가 없을 때

갈아엎고 싶은 게 작물뿐일까.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내다 팔지도 못할 무화과 열매를 따내면서

갈아엎고 싶은 마음은 또 얼마일까.     

언제 해가 날지 모르겠다.               



2020년 11월 어느 날 일기 우리에게 무엇이 남았을까?     


날이 춥다.

겨울에 들어서니

올여름 날씨가 얼마나 안 좋았는지

햇빛 보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벌써 가물거린다.     

해가 쨍쨍해야 할 8, 9월에 

계속 비가 내리고 내내 흐려

무화과가 빨갛게 익지를 않았다.

흐렸던 날들 속에서 따낸 무화과,

개중 제일 예뻤던 열매들을 사진으로 남겨 두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노린재가 까맣게 집어 놓고 간 흔적이 군데군데 보인다.

올해도 많이 버렸고 ‘그나마 나은 것’을 골랐지만 그것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흐리고 축축했던 여름을 보내고

하우스 안에는 마른 잎만 남았다.

가지는 벌써 잘라냈고

잘라낸 가지를 하우스 밖으로 다 들어냈다.     

조금이라도 햇빛을 잘 받게 하려고 깔아놨던 타이벡도 걷어내야 했고,

부직포까지 다 걷어서 거름도 주고 흙도 갈아야 한다.     


겨울 하우스에는 여름날 우리 모습이 남았다.

먼지만 한 벌레 한 마리라도 더 잡으려고

끈끈이 트랩을 하우스 측창 끝에서 끝까지 붙여 놨고,

벌레 잡는 트랩도 주렁주렁 달아 놨으며,

벌레를 유인하려고

나무 둥치마다 직접 만든 약을 놔뒀고

또 개미는 또 왜 그렇게 많은지

개미약도 군데군데 던져 놔야 했다.     


친환경 농사를 지으면 밭도 깨끗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병충해를 해결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야 한다. 

오히려 농약을 친 논밭이 깔끔하고, 농작물 모양도 매끈하다.     

그렇게 흐리고 축축하고 우울했던 여름날을 보낸 우리의 흔적만 남았다.

흔적은 볼품없다.

빈 페트병을 자르고

가마솥에 약을 만들어 끓이고 

끈끈이 트랩을 붙이면서

흘린 땀만큼, 보낸 시간만큼, 공들인 모든 것들만큼

우리에게 무엇이 남기나 했을까?     

벌레는 지난해보다 더 많았고

수확량도 지난해보다 줄었다.

버린 무화과도 더 많았다.     


친환경 농사를 계속 지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과

농사를 계속 지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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