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십 년
오륙 년 전까지만 해도 “귀농한 지 얼마나 됐어요?” 하고 물으면 “아직 몇 년 안 됐어요!” 그랬어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아직’이라는 말을 붙이기가 멋쩍어졌지요. 올해부터는 귀농 십 년 차에 접어들었다고 해야 하는데, 귀농 십 년 차라고 말하는 게 참 부끄러워요.
십 년이면 뭔가 이루어놨을 것 같고, 꽤 그럴듯한 노하우도 쌓였을 것 같고, 그래서 누구에게라도 농사에 대해서 한마디 해 줄 수 있을 자신감도 생겼을 것 같지 않나요.
그런데 우리는 해가 갈수록 농사짓는 일이 겁이 났어요. 몰라서 겁이 난 게 아니라 잘 알게 돼서 겁이 났어요. 우리 뜻대로 노력만큼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때로는 농사가 우리 노력을 배반하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실수했거나 노력이 모자랐거나 운이 안 맞아 농사를 망쳤더라도 딛고 일어설 기반이 있으면 그래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 텐데, 우리한테는 열정이나 신념 말고는 가진 게 너무 없었던 게 아닐까, 하고 귀농 십 년 차나 됐으면서 그런 핑계를 대 봅니다. 그런 괜한 핑계라도 대야지 우리가 울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십 년 동안 우리는 정말 애썼어요.
누구보다 열심히 농사지었고,
모르는 것도 많고 갖춘 것도 없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어요.
물론 실수도 했지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욕심을 부린 것도 같아요.
또 남들이 보면 한심스러워할 만큼 괜한 고집을 부린 것도 같아요.
그래서인지도 몰라요.
시골살이를 시작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한 십 년 째에 접어든 지금,
앞으로 계속 농사지을 수 있을 것인지를 걱정하고 고민하고 있는 까닭이요.
계속 농사지을 수 있기를
우리는 여전히 꿈꾸던 삶을 살기 위해 날마다 버둥버둥거리고 때로는 한숨을 푹푹 내쉬기도 해요. 그런데요, 이렇게 버둥거리면서도 다시 도시로 돌아갈 생각은 아직까지 없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농사를 지어 보려고 해요. 남들만큼 가진 것이 없어 고생이긴 하지만 남들보다 좀 천천히 해 나가자고 생각하고 있어요. 힘들겠지요. 지금보다 더 힘든 날이 한참 이어질 수도 있어요. 그러다 버터지 못하게 될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게 올해는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아직도 그렇게 생각해요.
스스로의 힘으로 자유롭게 삶을 이루어가는 데 농사만큼 좋은 일은 없다고.
우리의 용감한 선택은 옳았고,
나머지 몫은 우리한테 달렸다고.
또 십 년이 흘러 우리 이야기를 다시 쓸 때쯤에는 우리 땀이 눈에 보이는 결실로도 남게 됐으면 좋겠다고요.
우리는 끝까지 땀과 땅을 믿어 보려 해요.
또 그런 우리를 믿어 주는 좋은 사람들을 믿어요.
우리는 착하게 농사짓고,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농사꾼이 되고 싶어요.
그 첫 마음을 잊지 않고
계속 농사짓고 싶어요.
올해 봄날의 농사 일기가 끝이 아니기를 빌어요.
2021년 5월 어느 날 일기 _ 조바심
5월은 농사일이 한창 바쁜 때.
하지만 가을 수확기까지 아직 몇 달 기다려야 하니 돈은 궁한 때.
그래서 몸은 몸대로 바쁘고
마음은 마음대로 조바심이 난다.
무화과는 새 줄기가 얼마나 많이 올라오는지 모른다.
줄기를 솎아 주고 굵은 가지로 자라게 할 것만 남겨 놔야 한다.
줄기 솎는 작업을 하면서 부직포를 새로 깔고
나무 둥치 밑으로 끼워 넣고 가위로 자르고 하느라
몇 날 며칠을 쭈그리고 앉아서 일해야 했단다.
벌써 무화과 잎은 크게 자랐고,
콩알보다 작은 열매가 달렸다.
5월의 하우스 안은 덥다.
더위와 싸워야 한다.
무화과는 잘 자라야 하고,
우리는 지치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지치기 전에, 농사를 그만두지 않기 위해
올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다 해 볼 작정이다.
빌린 땅에 인디언 감자도 키우고 고구마도 키우기로 했다.
하루 날을 잡아서 인디언 감자랑 고구마 모종을 심으려고
동네 할머니 네 분에게 부탁해 시간을 맞춰 놨지만
전날 밤중까지 주렁주렁 이어져 있는 인디언 감자 덩굴을 잘라 놓는 일 같은 건
우리가 해야 한다.
할머니들이 고구마 모종 심는 동안
모종 죽지 않게 물 주는 일도 우리가 해야 한다.
봄비가 장맛비처럼 오다가 모처럼 해가 쨍쨍하던 날
인디언 감자랑 고구마 모종 심는 일을 하고 났더니
몸살이 났는데
그날 저녁, 볍씨 발아시킨다고 이틀 전에 발아기에 담가 둔 나락을 꺼내 보니
볍씨 촉이 너무 많이 자라 있었던 거다.
발아기에 삼 일을 두면 된다고 했는데
이틀 만에 너무 많이 자라 있었으니
또 한밤중에 부랴부랴
볍씨 담은 망을 꺼내서 물을 빼놓고
볍씨 촉이 한참 올라왔는데도
자동 파종기에 돌려도 되는지 동네방네 물어보고서는
아침 일찍부터 모판에 나락 파종하는 작업을 했다.
해마다, 일마다 순조로운 게 없다.
농사가 원래 그런 건가,
우리가 아직 서툰 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민망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이
파종기를 돌리고 모판을 옮기고
상토를 채우고 모판에 물을 주고
모판을 쌓고, 또 모를 키워야 한다.
5월에는 농사일만 바쁜 게 아니다.
마당과 텃밭은 잡초밭이 되어가고 있는데
집 앞을 돌볼 시간은 없다.
겨우겨우 시간을 내서
마당에 심어 놓은 복숭아나무
어린 열매를 솎아 주었다.
5월은 푸르고, 풀도 나무도 무럭무럭 자라는 때.
그래서 농사꾼은 많이많이 바쁜 때.
덩달아 마음도 바빠지는 때.
조바심이 난다.
올해 농사는 꼭 잘 돼야 되는데…….
잘 안 되면 안 되는데…….
그리고
조바심을 내면 안 되는데.
그것까지 잘 알고 있는데도,
우리는 충분히 힘들었던 것 같다.
올해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올해 농사를 짓는다.
내년에 농사지을 수 있기를,
설렜던 우리의 첫 꿈이자
간절한 우리의 마지막 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