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나에게 건배!

이 해결되지 않는 어정쩡한 오늘의 나에게 건배!

by 샷샷언니

석사 때 함께 동거동락했던 친구 J가 갑자기 연락이 왔다.



“ 잘지내니? S? 난 요즘 감정을 잃어버린 사람 같아.”


“ 나도 그랬어. 근데 나는 오히려 30대 때 더 많이 매달리고 더 어렸던 거 같아.

심지어는 사랑이 아닌 것도 그렇게 오래 붙잡고 있었어.

그냥 이 관계가 망가지는 게 싫어서

오기로 잡고 있는 그런 거 있잖아.”


“ 나는, 조금만 아니면 그냥 바로 손을 놓게 돼. 사람들이 나더러 냉정하다고 하더라구

난 내가 차갑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거든.

구질구질하면 구질했지.”


“글쎄, 난 그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아직은 감정을 잃어버린 것 같지는 않은데?”


“ 그런가… 결혼 빨리 하고 싶은데. 빨리 이 일도 그만두고 싶고. 그런데 대기업 나가면 더 결혼하기 힘들대서 버티는 중이야.”


“ 응, 내 생각도 결혼 하기 전까지는 그냥 다니는 게 좋을 것 같아. 요즘에는 남자들도 여자들 타이틀 본다.”


“ 아… 갈수록 내가 결혼 안하면 뭔가 하자 있는 사람 같아져.

S, 넌 내가 지금 나이에 돌싱을 만나는 건 어떻다고 생각해?”


“ 야~ 아직 아니야. 사랑하고 나서 보니 돌싱이면 몰라도 미리부터 그렇게까지 타겟 영역을 너무

오픈 하는 건 너희 부모님 너무 속상하시지 않을까? 그리고 돌싱이면 이유가 있지 않을까?”


“ 하, 근데 나 요즘 진짜 왠만한 애프터도 안들어온다고. 뭐가 문제일까?”


“ 우린, 직업이 문제란다.

나도 그랬어. 분위기 좋았는데 애프터가 없더라구.

뭔가 너랑 나랑은 패션을 하지 말았어야 해.

그냥 좋아만 할 걸.그렇다고 천재성이 있던 게 아니라

난 결국 비즈니스로 틀었는데"


“ 맞아. 뭔가 조금은 촌스러운 듯한 그런 평범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거 같아. 남자들은.”


“ 응, 굽 3 센티미터에 그 학생 구두 같은 앞에 리본 달리고 뭔가 촌스러운 목적없이 기른 듯한 뭉특한 긴머리에,

중요한 건! 말라야 해."


“ 야 완전 정답. 그 왜! 패션 감각이라고는 1 도 없는.”


“ 너 빨리 에이라인 스커트 하나 사. 발목 간당간당 오는 조신해 보이는. 소개팅 복장으로.

요즘 유행하는 체크나 트위드, 레더 치마

이런 거 입지 말고 좀.”


“ 아니야 나 진짜 수수하게 입고 나간다고!”


“ 됐어, 너 이런 트렌디한 트위드 자켓 입고 나가지마. 세련되 보이는 라인 말고, 이 참에 너 파스텔 톤에 이 색도 저 색도 아닌 듯한 살몬 코랄 이런거 앙고라 니트 하나 사. 거기다 에이라인 치마에 굽 3센티 구두 이런거 신어”


“ 아 ~ 야! 생각만 해도 싫어.”


“ 너 그렇게 레이어드 머리 하지 말라고 도회적인 센 느낌 드세다고 한다고.

무거운 듯 떨어지는 그런 느낌 있잖아! 그 약간 새로 온 신입이 자른 듯한 그! "


“ 아! 너 혹시 그 목적 없이 그냥 기른 긴머리 말하는 거니?”


우리의 이런 대화가 한창 이어질 즘, 옆자리의 목적 없이 기른듯한 긴머리를 한 여자가 컴퓨터를 탁탁 치며

우리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마자, 아줌마이지만 짙은 언더라인까지 꼼꼼히 매꾼 내 화장법이 더 효과를 발휘하는

째려보는 눈에 (*사실은 실제로 목적 없이 기른 듯한 긴머리를 오랜만에 보는 터라 놀란 눈이었다.)

바로 눈을 황급히 컴퓨터로 옮긴다.


그래, 웃기게 보일 수 있겠지.

아니 웃기다 못해 한심해 보이겠지.


나도 그랬으니까.


난 더하면 더했지 자존감이 높다 못해

독한 싱글의 표본이었으니까.


내가 이런 조언을 하게될 줄

정말 몰랐으니까.


그닥 생산적인 이야기는 아니니까.


어떻게 보면 심각하게 여성에 대한 자존감이 없는 이야기 처럼 보일 수 도 있으니까.

탄맛나는 커피의 찌끄러기 잔향인지 나의 감정의

찌끄러기의 잔향인지,


어정쩡하게 씁쓸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볍게 넘기기에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나도 심각하게 고민했던 이야기이자

나의 능력있는 대부분의 선배들이 모든 사람들이

이름 붙여준 ‘센’ 여자의 특히 골드 미스들의

고민인 것이다.




하단의 물음들을 늘 소개팅이나 선을 보고 오면 난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또 물어보곤 했다.





내가 강단이 좀 있기로서니 그렇게까지 (드)세어 보이는 걸까?


내가 좀 패션 감각이 유니크하지만 그렇게까지 (드)세어 보이는 걸까?


내가 화장이 좀 남들보다 진하지만 그렇게까지 (드)세어 보이는 걸까?


내가 아무리 패션 업계에서 일한다지만 그렇게까지 (드)세어 보이는 걸까?


내가 새벽 5시까지 남들이 안하는 야근을 한다고 해서 그렇게 까지 (드)세어 보이는 걸까?


내가 남들보다 더 빨리 승진했다지만 그렇게까지 (드)세어 보이는 걸까?




“그렇게 까지 쎄보이나. 나?

나 생각보다 엄청 온순하고 남자친구한테 여리고 순종적인데?”


“ 말 해 뭐해. 너랑 나같이 남자 말 위해주는 여자 있냐?”



아닐 수도 있다.



“그러니까. 야 어디서 이런 사람을 만나냐?”



물론 아닐 수도 있다.



“ 그니까 야 돈 잘 벌지, 이 정도면 관리 완벽하지,

뭐가 문제야?”



물론 매우 아닐 수도 있다.



"어우 야 말해 뭐하니? 눈이 뼜어 뼜어.."



물론 우리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 수도 있다.




“어우 완전 독해!”


뒤에서 진저리치는 남자 동료도 몇 번 보았고

(*나는 심지어 대놓고 말하는 사람도 많이 보았다.)


" 뭐 다른 이야기는 할 게 없고 잘하지만

너무 튀지말고!"


("응?? 뭐라고 하셨습니까?"를 꿀꺽 삼킨 것은 세상을 살며 잘한 일에 속하기도 잘못 한 일이기도 하다.)

한국 대기업 진급 후 들었던 인사평가였다.


일부가 아닌 그 말이

전부였던 평가.


세상 ‘나는 여자다’ 라는 에너지를 뿜뿜 뿜기는 여자 동료나 후배들이 하던 이야기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나는 그만큼 내 일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진심으로 이 일을 하기 위해서 남들보다 더 노력하고 더 다른 안락함을 포기함으로 인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게 그렇게 욕먹을 짓인 걸까?

한창을 이야기하다 내 머릿속을 읽기라도 하듯 J가 말했다.


“다 부러워서 그래. 겁나 질투나는데 널 이기지 못하니까 그냥 시샘하는 거야.”

“아니 이기고 뭐고가 아니라 왜 나 힘들게 야근하는 것 까지 ‘정치적이네,야망이 있네’ 하냐고.

아, 커피라도 한 잔 사주고 씹으라고."


퇴사 후 외국계로 몇 단계 승진한 나를 욕하는 사람들 때문에 침울해진 나에게 J 가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제자리고,

넌 달라졌잖아.”


그렇다.

난 제자리에서 벗어나 다시 달렸고 넘어지고

남들보다 미리 깨졌지만 해냈다.


그 한마디가 시시콜콜 사소하게 더 많이 들어주고 어떤 된소리나는 욕을 같이 해주는 것 보다도

머리 속이 정리되고 서운한 마음을 녹여준다.


그런데 왜 이렇게 뭔가 이겨내고 쟁취했는데도

마음이 불편할까.

잠시 화제를 J에게로 돌린다.


“ 아, 도대체 왜 너같이 매력있는 애를 냅두지?”

“ 아오, S 너가 남자였어야 해.”

“ 야 나 남자면 키작아서 너 나 쳐다보지도 않아.”

“ 왜 능력있잖아. "


서로 칭찬인 듯 아닌 듯 한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J가 말한다.


“ 이러다가 아무것도 못하고 더 나이만 먹는 게 아닐까?”


“ 아니야. 넌 근데 진짜 잘하고 있어.

나는 그 때 마시지도 못하는 술이나 많이 먹고 어디서

전혀 알지도 못하는 애들 만나면서 매 번 상처 받고.”


“ 나쁜 놈 들이 너무 많아.”


“ 아니면, 나쁜 놈들한테만 끌려서 그러는 걸 수도 있어. 착한 데 괜찮은 애들은 다 현명하고 여우 같은 애들이 데려가고. 그냥 착하기만 한 애들은 나쁜 여자들한테 데여서 걔들도 우리 같이 그러겠지.”


“ 아 여자들 다 별로야?! 나쁜 여자 천지야! 이럴까 ?”


우리끼리 한꺼번에 뱉어놓고 그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있다는 것에 감사해서 또 꺄르르 웃었다.


조금의 세밀한 대화는 다르지만 결론적으로는

모두 똑 같은 이야기, 똑 같은 전개와

똑 같은 해결책.

어제 만난 후배와 했던 이야기, 내가 예전 결혼하기 전 선배와 밥을 먹고 카페에 늘어져 앉아 늘 하던 이야기.


조금씩 디테일은 다르지만 다이얼로그가 각본인 듯 똑같다.


그렇게 한창을 떠들고는 결국 본질적인 허탈함에 다시 힘이 쭈욱 빠져 풍선에 바람이 쓔욱 빠지듯이 멍하니 비어 있는 커피잔을 쳐다보았다.


“넌 남자로 태어나야 했어. 대장부로 더 큰 일을 했어야 해”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인사하던 J가 말한다.

J의 말에 많은 페미니스트 들이 돌을 던진다 하더라도

난 그녀의 말이 무엇인지 안다.


아마 많은 '우리'는 이 말이 남성우호에 대한 이야기나 여성에 대한 비난이 아니란 것을 안다.

그냥 이것이 현실.

경제적으로 가장이지만, 집에서는 늘 바빠서 아이를 잘 챙기지 못하는 항상 죄책감을 지우지 못하는 엄마,

그리고 항상 출장이 잦아 시댁에 기댈 수 밖에 없는 시부모님께 제대로 못하는 바쁜 며느리,

항상 남편보다 늦게 퇴근해서 아이 목욕을 시키고 있는 남편에게도 늘 바쁜

죄스러운 아내.


뭔가 늘 낙제생 같은 느낌을 떨칠 수 없는 나의 모습은,

왜 이렇게 자랑스럽지도 당당하지도 않은

어정쩡한 모습일까.


또는 왜 늘 일도 80%, 육아도 70%,

안간힘을 써도

늘 어정쩡한 이 모습을 온전히 받아 들이질

못하는 걸까.


뭔가 최연소 승진 등으로 끝나지 않던 갈증이

골드 미스라고 남들은 인정해주지 않는

'노처녀'라는 나의 원하지 않는 나를 설명하는 부제목만

없애면 될 줄 알았는데,

남들이 원하는 잣대에 맞추어 가정을 이루고

잘 이겨내면 무언가,

매우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 ,

어정쩡함.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이 안에서.

나는 해답을 찾고 있다.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이 질문에,

오늘도 내일도 분명 정답이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답을 찾고 있다.


손에 든 뜨겁던 아메리카노가 특유의 찌꺼기 향을

입안에 씁쓸함을 남기고 어정쩡하게 식어있었다.


허공에 손을 들어 건배한다.



" 오늘의 나는 그래도 노력중이니, 건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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