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쉽지 않다, 고 말할 수 있을까.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열의가 없어서 어려웠을 수도 있다. 대체로 주춤거렸고 흠뻑 빠질 정도로 무언가를 좋아하지 않았다. 너무 좋아서 통제력을 잃는다는 것은 끔찍하다. 술 취하더라도 자아가 기세 좋게 살아 있어 흐트러지는 대로 스스로를 관찰하는 부류다.
가볍게, 생각 없이, 방금 떠올렸다는 듯이 직장 상사가 말했다.
“자기, 방송댄스 같은 거 배워 보는 거 어때?”
이 말에 대답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방송댄스보다는 요가가 낫다.(요가도 배워본 적은 없으나) 의미 없이 재주도 없는 기술을 익히기보다는 가만히 앉아서 응시하는 쪽에 가까운 요가가 마음에 든다.(요가에 대한 내 생각은 명상에 가깝다.) 못하는 분야에서 허우적대며 나는 왜 이렇게 재주가 없을까 자기혐오에 빠질 필요는 없으니까. 이렇게 말하면 시대에 한참 뒤떨어지는 사람이겠지만 굳이 자기 계발을 해야 하나 고민한다. 자기 계발이라는 문장이 있는 책은 웬만하면 들여다보지 않는다. 내 관점에서 자기 계발은 하고 싶은 일을,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하는 거다. 새벽에 책 읽기, 낮에 책 읽기, 틈틈이 책 읽기 외에 원하는 일은 거의 없다.(물론 돈이 많으면 좋겠고 가족의 건강도 중요하나 순수하게 나와 관련된 자기 계발 측면에서 말이다.)
책 읽기가 좋다는 것은 실제 삶과는 거리가 있다는 말일 수도 있다.(직장 상사가 방송댄스를 권한 이유를 조금은 이해한다. 그렇다고 직장 상사의 조언을 따르고 싶지는 않다. 하고 싶지도 않은 허우적이라니.) 어느 정도는 도피 일 수도 있고.(세상에서든지 자기 자신에게서든지)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할까. 분석할 시간에 마음에 드는 책 한 권 들고 마지막 장까지 오면 미소가 지어지든지, 한숨이 쉬어지든지, 빨리 다른 책을 읽고 싶어 지든지 다시 삶과 거리가 만들어질 텐데.
패티 유미 코트렐의 <내가 당신의 평온을 깼다면>
삶은 힘들다, 라는 명제에 적합하다. 죽음이 관대하다고 느낄 정도로. 헬렌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됐다. 남동생도 마찬가지다. 남동생이 자살했다는 소식에 헬렌은 성인이 된 후 끊긴 인연이나 마찬가지인 양부모의 집을 찾기로 한다. 왜 동생이 자살했는지 파헤쳐 보기 위해서. 어두운 기운 가득했던 양부모의 집.
작가 패티 유미 코트렐은 실제로 한국 입양아다. 작가처럼 한국에서 입양된 남동생은 실제로 죽었다. 인터뷰에서 작가는 “이 소설은 대단히 사적이지만, 내게 일어난 일을 염두에 두고 책의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역시 삶은 어렵다.
“우리는 너무 아둔해서 창밖으로 나가 지붕 위로 탈출할 생각도 못 했다. 너무 아둔해서 그저 잘못했다고 빌 줄밖에 몰랐다.”
프로이트 <인간 모세와 유일신교>
모세가 이집트 사람이다? 이집트의 유일신을 모세가 받아들였고 그 신이 자국에서 설자리를 잃을 때에 야망에 찬 모세는 히브리인을 데리고 이집트 땅을 떠난다.(출애굽)
“종교적 현상들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개인들의 신경증적 증상의 표본에 기초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종교 서적만 읽을 때가 있었다. 종교는 여전히 신비다. 성경을 읽어봤고 여러 설교를 들어봤으나 모세가 이집트 사람일 수 있다는 학설은 처음 들어봤다. 유대교의 유일신이 이집트로부터 전달됐을 수도 있다는 것도.(설일뿐 사실은 알 수 없다.) 사실이든지 아니든지 이런 게 좋다.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해오던 것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콕콕 내 머리를 두드리는 느낌을 주는 책들.(최근은 르네 지라르 책이 그랬다.) 책 속에 언급해 있는 <토템과 터부>도 도서관에 예약하고 기다리고 있다.
장 자끄 상페의 <아름다운 날들>의 마지막 구절“난 이제 하루에 두 시간만 머리가 말짱해”
끼익 문소리를 내면서 아이가 나온다.
새벽 다섯 시 혹은 저녁 다섯 시.
우리 나도 왔네, 노트북을 덮는다. 아이를 안는다.
하루에 두 시간만 머리가 말짱해지는 시간이 오면 지금 이 순간들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너를 안을 수 있는 시간들은.
삶이 쉽지 않다, 고 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