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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바나나라는 새장

마야 안젤루 <새장에 있는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아네>를 읽고

by 북남북녀


앗, 이런 바나나 꽃인데. 요시모토 바나나 책을 읽고 올린 글에 이웃분이 댓글을 달았다. 만일 내가 작가가 된다면 저자 이름에서 성을 과일로 해도 어울릴 거 같다고. 요시모토 바나나도 바나나를 좋아해 요시모토 바나나라는 필명을 지었다고 답글을 달았는데, 며칠 후 요시모토 바나나는 열대지방의 붉은 바나나 꽃을 좋아해서 필명을 지었다는 이력을 읽었다. 그런데 이건 이미 몇 번이나 읽었던 내용이다. 책을 읽을 때면 이력을 읽기 때문에 반복해서 읽어왔던 내용인데 ‘바나나’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한 번도 본 적 없는 붉은 바나나 꽃은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노란 바나나만 존재했다.


아역배우들도 외모로 배역이 갈리네, 생각하며 드라마를 봤다. 세자 역의 아역배우는 얼굴이 하얗고 눈이 크고 날씬하다. 내관 역 아역 배우는 살집이 있다. 주인공인 세자는 당연히 잘생기거나 예쁘겠지, 라는 생각을 하다가 누가 나에게 얼굴이 하얗고 눈이 크고 날씬하면 예쁘다고 가르쳐준 것일까(그런 사람이 주인공이라고) 궁금해졌다. 내 외모의 기준은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아네>의 마야 안젤루는 흉측한 꿈에서 깨어나면 자신이 곱슬머리에 몸집이 큰 검둥이 계집이 아니라 연푸른 눈동자에 금발머리를 가진 백인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린 마야 안젤루에게 곱슬머리 흑인보다 금발머리 백인이 아름답다고 누가 알려 준 것일까. 흑인인 자신의 현실이 흉측한 꿈처럼 느껴지도록.


1928년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난 마야 안젤루가 성장하는 시기에는 인종, 외모, 남성과 여성, 빈부의 격차가 극명하게 갈리는 시대였다. 흑백 분리가 강한 남부의 흑인들은 종교에 의지하여 고역스러운 시간을 버텨나가고 그보다 나은 도시의 흑인들은 사기나 도박에 가담하며 생활한다. 흑인들은 밑바닥에서 노동하는 일 외에 더 나은 일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마야 안젤루가 치통이 심해서 할머니와 함께(할머니에게 신세 진) 백인 치과의사에게 갔을 때 “내 원칙은 말이요, 검둥이 입에 내 손을 집어넣느니 차라리 개 주둥이에 집어넣겠다는 거요.”라는 소리를 듣는다. 일하는 집의 백인 부인이 마야 안젤루의 이름을 번거롭다는 이유로 ‘메리’라고 부르자 그 집에서 20년 일해 온 하녀 미스 글로리는 마야 안젤루를 위로하며 말한다. “내 이름은 본래 할렐루야였어. 그게 우리 어머니가 지어주신 이름이었어. 그런데 주인마님이 나에게‘글로리’라는 이름을 지어주셨고, 그게 지금까지 굳어져 버렸지 뭐야. 지금은 나도 그 이름을 더 좋아해.”(마야 안젤루는 백인 부인이 아끼는 접시를 깨고서 그 집을 나온다.)


이름을 마음대로 바꿔 부르고 그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과 그것을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마야 안젤루는 샌프란시스코의 최초 흑인 여성 전차 차장이 된다. 그 후로 시인이자 소설가, 가수, 작곡가, 연극배우, 극작가, 영화감독, 제작자, 여성운동가, 저널리스트, 역사학자, 대학교수, 강연가 등의 직함을 갖는다.


새장에 갇힌 새는 왜 노래할까.


새장에 갇힌 새는 자유를 노래하니까.


노란 바나나라는 새장에 나는 갇혀 있다. 알고 있는 것에 갇혀 열대지방에서 핀다는 붉은 바나나 꽃은 내 머릿속에 존재할 수 없었고 외모의 기준에 갇혀 내 외모를 스스로 비하한다. 내 지식에 갇혀 새로운 지식을 멀리하며 세상을 보는 기준에 갇혀 다르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알고 있는 사람들에 갇혀 낯 모르는 사람에게는 미소 짓지 않는다.


아는 것들과 보는 것들과 듣는 것들에 나는 갇혀 있다. 그 모든 것으로 촘촘하게 새장을 짜고 들어앉아 세상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한탄한다. 새장에 갇힌 새가 사는 방법을 마야 안젤루는 말해준다. 갇혀 있기 때문에 노래하고 갇혀 있기 때문에 열망한다는 것을. 갇혀 있기 때문에 날기를 꿈꾸고 갇혀 있기 때문에 날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을 알려주려고 마야 안젤루는 자신의 인생을 열었다.


새장에 갇힌 새는 두려움에 떨리는 소리로 노래를 하네.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여전히 열망하는 것들에 대해.

그 노랫가락은 먼 언덕 위에서도 들을 수 있다네.

새장에 갇힌 새는 자유를 노래하니까.


마야 안젤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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