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이 보여주는 것들
에밀 시오랑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빌릴까, 말까. 읽을까, 말까. 같은 해에 태어나거나, 비슷한 연령대 작가라면 일단 고민한다. 비슷한 나이대의 작가가 이렇게 글을 썼구나, 책을 냈구나 하면 싸르르 한 통증이 느껴진다. 어느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배 아픈 가수’라고 자신을 소개한 무명가수가 있었다.(지금은 유명 가수가 됐지만) 배가 아파서 다른 오디션 프로그램도 잘 안 봤다는 말에 나도 그런데, 라는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유명 연예인 부부가 제주도에서 민박집을 운영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는 설거지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설거지를 하고 있으니 제자리에서 왔다 갔다 하는 아르바이트생의 뒷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자기의 자리라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밀어내지도 못하고, 뚫고 들어가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다른 사람이 알아서 비켜주길 기다리거나, 비켜주지 않으면 돌아서는 게 익숙한 사람들.
시를 읊는 여자가 나오는 오래된 드라마도 있었다. 대가족의 둘째 며느리는 남편과의 사이가 원만하지 않고 대가족의 생활에도 잘 섞이지 못한다. 어릴 때 본 드라마라 기억이 희미하지만 다른 사람과 잘 소통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 (식탁에서 밥을 먹는 중이거나, 거실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든지) 여자는 뜬금없이 시를 읊었다. 청승맞기도 하네. 좋은 시를 왜 저리 (청승맞게) 사용할까 불만이었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책을 읽는 내게 문학소녀네, 누군가 말하면 책 읽는 걸 좋아하지만 문학소녀는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문학소녀라는 말은 드라마에서 청승맞게 시를 읊는 여자 같았다.
상처 받은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내는 <네 멋대로 해라>라는 오래된 드라마는 좋아한다. 솔직한 사람들이 등장하고 솔직한 모습이 청승맞지 않다. 서로의 솔직함을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진심에 진지하다. 진심이 아닌 사람들이 없었다. 인간관계에 대한 판타지를 담고 있는 드라마였다.
싫어, 싫어 떠올려지지 마. 묻어 놓은 기억들을 낚싯대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게 하는 의학 드라마도 있었다. 악, 소리 지르고 어딘가로 도망가고 싶었다.
시간은 이제(텔레비전 보기보다는) 밥하는 아줌마로 나를 만들었다. ‘이 지상에서 믿을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구원은 망각 속에 있다'고 말하는 에밀 시오랑에게 밥 한 공기 먹이고 싶은 오지랖 넓은 아줌마로.
‘삶이란 열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는 화덕에서 타고 있는 불꽃'이라고,‘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권리는 행복이 아니라, 보다 적은 불행'이라고 너무 비관적이어서 오히려 유쾌한 프랑스 문화심리학의 대가라는 사람에게 뜨거운 밥 한 공기 내밀고 싶다. 밥은 고뇌가 없다. 누군가를 먹이는데 고뇌가 있을 수는 없으니까.
침묵을 최고의 가치로 평가한다는 것은 삶의 테두리 밖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위대한 구도자와 종교 교주들이 침묵에 경의를 표하는 이유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데 있다. 그것은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고, 복잡다단한 인간사가 지긋지긋해서, 침묵 외에 어떤 것에도 관심을 갖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이다.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에서
이 삐딱하고 비관적이고 염세주의적인 철학자의 책은 요약할 수 없다. 범위가 넓고 깊다. 저자는 죽음과 허무와 슬픔을 말하지만 그것들과 깊게 사랑한다. 계속 아파하고 싶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