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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군데, 내가 누군데

이창동 <소지>

by 북남북녀

옷깃을 여미며 밖으로 나가는 계단 옆, ‘우동’이라는 간판이 달린 허름한 매점 안에서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50대의 깡마른 여사장이 삼일이나 사일에 한 번씩 우동 육수를 커다란 플라스틱 통에 담아 온다. 갈색 불투명해 보이는 육수 속에 어떤 재료들이 어떻게 들어가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사장은 낑낑거리며 플라스틱 통을 양손으로 들고 매점 안으로 들어섰고 육수의 비밀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을 거라고 큰소리로 말하며 웃었다. 높은 톤의 가느다란 웃음소리가 매점 안을 가득 채운다. 무슨 대단한 맛집이라고 육수의 비밀이야, 육수의 비밀 따위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텐데,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육수통을 테이블 밑에 옮긴 사장이 시장에서 샀다며 검은색 비닐봉지 안에 든 것을 테이블 위에 펼쳐놓는다. 일고여덟 살쯤 된 남자아이 옷이다. 머드타드색 상의에 녹색 골덴바지 하의를 맞춰놓고 아들을 보듯 흐뭇하게 바라본다. 언젠가 우리 아들은 엄마, 라는 말 밖에 못해라고 말하며 특유의 깔깔거리는 톤으로 웃었었다.


아들에게 장애가 있다는 말은 직원 언니를 통해 들었다. 이 매점의 진짜 사장은 여사장의 친구고 여사장은 친구의 부탁을 받고 관리 정도 하고 있다는 것도. 통곡 같은 웃음으로 깔깔거리던 사장이 이곳저곳을 훑은 후에 수고해, 라는 말을 남기고 매점 밖으로 나간다. 직원 언니는 두 손을 모으고 안녕히 가시라고 공손하게 인사한다. 이제 20대 중반이 된 언니는 오전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지하철 계단 입구 매점에서 주말 없이 일한다. 한 달에 두 번 쉬는 날이 있지만 내가 아르바이트하는 동안 언니가 쉬는 것을 본 것은 두 번이었다. 삼 개월 동안 내가 쉰 날은 네 번이다.


일자로 된 간이 테이블 한쪽에서는 여덟 살쯤 된 남자아이와 아버지가 우동과 김밥을 먹고 있다. 아버지는 아이의 그릇에 우동면을 덜어주고 김밥을 한 개씩 놓아준다. 아이는 배가 고픈지 우동면을 입안에 가득 넣고도 김밥을 또 입으로 가져간다. 아버지는 숟가락으로 우동국물만 떠먹으며 그런 아이를 바라본다. 한자리 걸러 옆 의자에는 군인이 혼자 우동을 먹고 있다. 휴가를 나온 건지 들어가는 건지 군인은 말이 없다. 너무 짜, 못 먹겠어라는 말을 속삭이며 젊은 여성 두 명이 우동과 김밥을 먹고 있다. 내리는 눈발에 즉흥적으로 들어오게 된 건지 음식에 대한 불만이 계속된다.


직원 언니와 나는 여성들의 속닥거림이 들리지 않는 듯 국수 면을 삶는데 집중한다. 커다란 밥솥 안에서 끓고 있는 물에 언니가 단단한 생국수 면을 넣자 나는 싱크대 위에서 커다란 소쿠리를 들고 국수 씻을 준비를 한다. 지하철역에서는 불사용을 못하기에 커다란 전기밥솥으로 여러 가지 음식재료를 익혀야 한다.


그때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가 난다. 나는 소쿠리를 놓고 문이 열린 매점 끝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검은 모자에 검은 솜 점퍼를 걸친 남자가 서있다. 검은 솜바지를 입고 군인화 비슷한 워커를 신은 등치가 커다란 남자가 내 앞으로 손을 내민다. 저는 아르바이트하는 사람이에요, 드릴 게 없어요. 역 안의 노숙자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왔고 나는 그때마다 항상 하는 말을 남자 앞에서 반복한다. 남자가 둥그런 간이 의자를 집어 든다. 큰 눈이 부라리듯 나를 쏘아본다. 커다란 짐승 같은 남자의 시커먼 손톱에서 새빨간 매니큐어가 반짝인다. 내가 누군데, 내가 누군데. 남자가 뭉개지는 발음으로 중얼거린다. 내가 누군데, 내가 누군데. 남자는 쏘던 시선을 거두고 의자를 내려놓는다. 내가 누군데, 내가 누군데. 남자는 돌아선다.


내가 누군데, 내가 누군데. 눈발이 날리는 잿빛 하늘이 계단 끄트머리로 보인다. 옷깃을 여미며 밖으로 나가는 계단 옆, ‘우동’이라는 간판이 달린 허름한 매점 안에서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인연이 없다, 는 말은 기력이 없다는 말이었다. 인연을 이어갈 어떠한 힘도 낼 수 없었다. 인연을 이어가려고 최대한의 노력을 하게 만드는 사람들에게 화를 냈다. 여기 있잖아. 일어나고 세수해서 옷을 걸치고 앞에 앉았잖아. 좀, 그냥 내버려 두라고.


내 부끄러움은 내 부끄러움만은 아니다. 사회의 부조리 속에서 개인의 부끄러움은 흘러나온다. 그렇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이창동의 <소지>를 읽으며 생각했다. 자신을 견딜 수 없는 이유가 꼭 자신만의 문제로 인하여서는 아니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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