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에는 공감이 가지 않았다. 중산층, 다정한 남편, 남에게 뒤처지지 않을 학벌을 가진 여성이 집에서 육아만 한다는 이유로 정신 질환이 올 수 있을까. 대한민국에서 그 정도로 취약한 위치에 여성이 놓인다는 것을 말하는 취지로 읽어냈으나 내게는 무모한 서사로 느껴졌다.(태어나면서부터 반갑지 않은 위치에 놓여 살아남은 여성이 이렇게 약하다고?) 동일하게 영화 <기생충>의 가난도 불편했다. <기생충>이 말하고 싶은 것은 가난한 사람은 역시 가까이하면 안 된다는 교훈이었을까 아니면 가난한 사람은 냄새가 난다는 결론이었을까. 해외에서 받은 시상식에 부회장이라는 신분의 사람이 올라갔다. 그럴만한 영화였다. 가진 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내가 어쩌지 못하는 일들로 넘쳐났다. 나는 조용히 떠나 깊은 산 속이나 수도원 같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시스템에 대해 생각하기에 내 지식은 얕았고 상황은 나빴다. 많은 것들이 내 잘못이었다. 알 수 없는 중압감은 무기력증이 되어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지 못하게 했다.
굳이 살 이유가 없었지만 굳이 죽을 이유도 없었다. 먹고, 사는 존재로 연명하는 것이 다 였다. 에릭 호퍼가 시력을 잃은 경험이 외부의 자극에도 그의 길을 걷게 했을지 모른다. 다른 사람의 추대에도, 정착하라는 사랑에도 에릭 호퍼는 도망치듯 다시 길 위로 오른다. 그의 본능이 그가 정착을 견디지 못하리라 말한다. 사람들이 말하는 자신의 가치를 그 자신은 믿지 못한다. 처음부터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재앙이 그를 이끌었다. 돈, 명예, 지위 같은 외부의 가치는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무너지는 집과 눈물 흘리는 어른들이 내 안에 새겨진 이미지다. 여기에는 두 존재가 등장한다. 집을 부수는 사람과 말리며 눈물 흘리는 사람. 부수는 사람은 감정이 없다. 그들은 그들의 일을 할 뿐이다. 집은 무너지는데 잘못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도 잘못하지 않는데 불행한 사람은 있다. 경험은 그것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잘못하는 사람이 없는데 사람은 아팠다.
사는데 노력을 기울이지 않겠다는 것은 내 안 깊숙이 새겨진 본능과 같다.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어마어마한 노력을 들인다 해도 무너지는 곳은 무너지고 노력과 상관없이 세워질 곳은 세워진다.
<칼의 노래> 이순신에 자기를 이입할 수 있는 자는 ‘강력한 자기’의 존재를 알고 있거나 믿고 있는 자다.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강력한 자기’의 설명이 <골든아워>다.
김훈은 산문에서 이국종은 서문에서 서로를 위한다. 이들은 ‘강력한 자기’를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이 옳다는 강력한 확신이 있다.
에릭 호퍼는 그의 자서전에 반짝이는 것만 적었다. 떠돌이 노동자의 삶이 반짝이는 것만 있지 않으리라는 것은 쉽게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그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시력상실이라는 암흑을 미리 경험한 것은 이 세상의 암흑이 그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자유를 선사했다.
'통증으로 절절 끓는 밤을 위로해주세요'라는 문구가 머릿속에 떠다닌다.
백신 주사도 맞지 않았는데 통증으로 절절 끓는 밤이 있었다.(이유가 있어서,이유가 없어서 사람은 아프다.)
무너지는 가운데 선택한 결과들이자 과정들이 지금이다. “내가 불만 품는 걸 내키지 않아 하는 것은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가 에릭 호퍼의 자서전 마지막 문장이었다.
도서: 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이국종 <골든아워 1>
조남주 <82년생 김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