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있었던 일

장 자크 상페 <얼굴 빨개지는 아이>

by 북남북녀

열심히라는 말의 정의는 곧 있으면 쓰러질 것 같은 순간이라고 선생님은 말했다. 사십 대 동그란 안경을 쓴 과학선생님은 가난을 극복하고 한국에서 최고의 대학을 졸업했다는 자부심이 빳빳한 와이셔츠 깃에서도 흘러나왔다. 연탄가스를 마신 선생님을 아버지가 업고 병원으로 뛰었다는 이야기를 틈날 때마다 들려줬다.


곧 있으면 쓰러질 것 같은 순간을 체험해 보고자 처음으로 독서실을 끊었다. 코피도 흘려보리라 다짐했다. 학교가 파하면 교복을 입고 독서실로 향했다. 굳은 각오로 책상 위 조명을 켠 채 자고, 눈 뜨고, 자고, 또 잤다. 날이 밝으면 집에 들렀다가 학교로 향했다. 독서실 조명 밑에서 밤새 잤더니 피부가 좋아진 것 같아, 얼굴이 반질반질해라는 내 말에 에스는 눈을 끔뻑끔뻑하면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한없는 자유주의자에 철딱서니 없다고 톰 소여라 나를 부르던 에스는(내게는 한없이 심각하고 진지해 보이던 괴테를 좋아했다.) 그렇지 않을 것 같다는 의견을 진지한 얼굴로 전해왔다. 그렇겠지,라고 에스의 의견을 받아들인 나는 그 후로 독서실을 가지 않았다. 독서실 문 앞까지 갔던 적도 있었으나 여기서 자나, 집에서 자나 마찬가진데 편히 자야지(피부가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미련 없이 돌아섰다.


독서실 비슷한 데는 기웃거리지도 않다가 학교를 졸업한 뒤에 시립도서관을 알게 됐다. 넓은 열람실은 굴속을 연상시키던 독서실처럼 어둡지도 답답하지도 않았다. 자료실에서 원하는 만큼 책을 볼 수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한 가지 단점이라면 좋아하는 자리에 앉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는 거였다.

등 뒤로는 벽이어야 안심이 됐고 졸릴 때 내다보거나 문을 열 수 있는 창이 바로 옆이어야 했다. 전화가 오거나 밖으로 나갈 때를 대비해 입구에서는 가까운 게 좋았다.(내 발소리에 다른 사람들이 신경 쓸까 봐 내가 더 신경이 쓰이기에) 자주 다니던 산 중턱의 시립도서관에는 그런 자리가 딱 하나 있었다. 이 자리를 맡기 위해서 도서관이 문을 여는 일 곱 시까지 도착해야 했다.


이삼 분 늦게 도착한 날이었다. 열람실 문을 여니 띄엄띄엄 두세 명의 사람이 앉아 있었다. 앉고 싶은 자리에 이미 다른 사람이 앉아 있어 망했다, 속으로 생각하며 그 옆 옆자리에 짐을 풀었다. 창가 자리나 끝자리는 그 자리 말고도 남아 있었으나 매일 앉는 자리에 가까이 있는 게 마음이 편했다. 앉은 사람이 나보다 먼저 도서관을 나가게 된다면 그 자리로 옮겨갈 가능성도 생각했다. 가방에서 책을 꺼내 정리한 뒤 커피를 빼오려고 밖으로 나갔다. 커피를 들고 자리로 돌아오니 내가 매일 앉던 자리가 비어 있었다. 내 책상 위에는 ‘빨리 오셨는데 자리에 앉지 못하게 해서 죄송해요. 먼저 가니 편하게 앉으세요’라는 쪽지가 놓여 있었다.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앉을까 싶어 나는 재빠르게 짐을 옮겼다. 창밖으로는 익숙하게 봐왔던 도로와 건물이 보이고 커피는 따뜻했다. 자리를 양보해 준 사람이 더 좋은 자리를 찾았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꺅, 비명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지 책상 위로 고개를 들었다. 두세 건너 줄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앉은 사람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녀, 그래 그녀는 눈이 꽤 좋은 모양이다.)눈이 마주친 후 순식간에 빨개지는 내 얼굴을 목격한 그녀는 큭, 웃음소리가 날 듯한 표정을 지었다. 눈이 꽤 좋은 나는 그녀의 웃음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그날 식당에 가거나 화장실에 갈 때마다 큭, 웃는 그녀와 마주쳤다.


큭, 웃는 소리를 견딜 수 없어서 앉은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나와 집으로 향한 후에는 엠을 만나 하소연을 했다. 엠과 나는 하던 이야기를 끊을 수 없어 거리를 왔다 갔다 하며 밤을 새우는 날이 많을 때였다. 그날도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서 밤거리를 걸었다.(얼굴은 왜 빨개지는 걸까, 겨울에는 더 빨개) 며칠 후 엠이 하얀색 표지의 책 한 권을 내밀었다. 마르슬랭 카이유라는 꼬마가 등장한다.얼굴이 빨개지는 마르슬랭은 귀여웠다. (그렇다고 내가 귀엽다는 말은 절대, 절대 아니지만)


keyword
북남북녀 도서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주부 프로필
팔로워 531
작가의 이전글생각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