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신자들>을 읽으면서 독학만으로 이런 글을 쓸 수 있구나 놀랐다.(저자가 시력장애와 떠돌이 생활로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논지를 펴기 위한 다른 저자들의 인용구들, 세계정세를 읽는 관점, 상황에서 길어 올린 깊은 사유. 짧은 지식으로 그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어떤 것을 맹신하는 이유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덮으려고 하거나 좌절한 자신에게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라는 것은 알아들었다. 대중운동의 흐름은 좌절한 자들의 자신을 벗어나려는 몰두에서 파생한다.(이것이 진실의 한 조각을 품고 있다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숭고한 대의로 보인다 해도-얼마나 불완전한 건지) 단결이나 자기희생 같은 고귀해 보이는 가치들도 사람의 불완전함에서 흘러나오는 것들이라면.
프랑스의 사상가 시몬느 베이유가 생각나기도 했다. 시몬느 베이유는 철학교사로 가난한 노동자 계층을 위하여 자기희생적인 삶을 살았다.(겨울철에 난방도 하지 않고 먹는 것도 절제했다. 공장으로 들어가 여공 생활을 하다가 손을 다치기도 한다.) 이 행동들은 시몬느 베이유가 가지고 있는 신앙과 함께 사랑에서 나온 것으로(벗어나려는 자기가 아니라) 나는 생각한다. 에릭 호퍼의 떠돌이 생활이(좌절한 사람들을 자주 접했을) 그의 학문에 토대가 됐다면 시몬느 베이유의 자기희생적인 삶 역시(가난한 사람보다 더 가난한 생활을 선택한) 시몬느 베이유 학문의 토대가 됐다.
“꼬마 계집애처럼 자연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고백하느니 차라리 꽃 이름들을 다 외우는 편이 낫다.”라고 수전 손택은 일기에 썼다.
모른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나는 배우지 않았다는 것이 도피처나 마찬가지다. 철학이나 과학, 글쓰기조차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으니 이 정도면 됐다는 자기 위안. 언젠가는 체계적으로 배워보고 싶은 바람을 품고 있으나 이 ‘언젠가는’은 아이들이 다 커서 내 손이 덜 가는 나이쯤이 될 텐데. (그때 되면 내 나이는 도대체 얼마인 거지?)
잎이 돋았다가 때가 되면 잎을 떨어뜨리는 나무에 대해서, 비 오는 날 창가에 맺히는 빗방울에 대해서, 오늘 내게 불어오는 바람에 대해서 알고 싶다. 내 눈앞의 사람들에 대해서, 오늘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알고 싶다. 지금은 눈먼 사람처럼 세상을 본다. 명확하게 보이는 것들이 많지 않다.
세상의 많은 불행이 인재였다, 는 것을 생각하는 요즘이다. ‘인재’가 일어나는 이유는 돈이라는 생각도. 배우고, 배워야 할 텐데. 읽고 읽어야 할 텐데 생각은 빠른 해결책을 향하고 몸은 피곤하다. <맹신자들>의 저자 에릭 호퍼는 어떤 사고의 흐름이 막히자 자신이 그전에 도움을 얻었던 책으로 손이 뻗는 것을 알아챈다. 그것을 알아채자 그는 그 책을 던져버린다. 시몬느 베이유 역시 위안이 없어야 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어떤 보상도 없어야 한다고.
완벽하지 못한 길이 내 길일 수 있다. 불완전하고 좌절한 자신을 견디지 못해서 카리스마 있는 다른 대상에 투사해서 신념을 가졌다고 착각하며 가는 길이 맹신자들이다. 자신의 길이라면 오히려 불연속적이며 혼란스럽고 뭐가 뭔지 모르는 길일 수도 있다.(이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들이 자신과 가까이 있다고, 혹은 자신이라고 말해질 수 있는 것들이지 않을까)
쉽게 빠져나가려 하지 말자. 모른다는 것은 아는 것과 연결될 희망이 있다.
“불만족스러운 자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 혹은 그런 자기를 숨기고자 하는 욕망은 좌절한 자들 내면에서 무언가를 가장하며 과시하는 능력, 자기를 주저 없이 웅장한 군중과 일체가 되도록 하는 의지로 발전한다.”
“쓸모없는 자신에 대한 강한 혐오와 그 감정을 잊고 위장하고 벗어던지고 없애버리고자 하는 욕구가 기꺼이 자기를 희생하고자 하는 의지를 낳으며 결속력 높은 집단 속에서 자기를 잊고자 하는 의지를 낳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신봉하는 대의가 얼마나 숭고한 것이냐가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열성적으로 매달릴 수 있느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