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의 관계
마거릿 애트우드 <나는 왜 SF를 쓰는가>를 읽고
마거릿 애트우드는 <나는 왜 SF를 쓰는가>를 어린 시절부터 SF와 얽혀온 개인사에 관한 책이라 한다.'평생에 걸쳐 맺어온 관계를 탐험한 기록'이라고.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바깥에서 놀기만 하다가 학교에 입학하여 한글을 깨쳐가고 있을 때쯤 기숙생활을 하며 공장에 다니던 큰언니가 종종 집에 방문했다. 직장 생활을 하기에는 앳된 나이로 볼살이 통통했던 언니의 손에는 책 한 권이 꼭 들려있었다. 시 모음집, 세로줄로 된 수필선, 경고성 문구가 적혀 있던 포장지로 감싸인 책. 언니는 직장으로 돌아갈 때면 책을 두고 갔고 나는 언니가 두고 간 책들을 읽는 새로운 놀이를 추가했다.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을 <목마와 숙녀>라는 시에서 처음 봤고,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김소월의 애처로운 운율을 동요처럼 읊어댔다. 글자가 개미처럼 보여 읽기를 포기했던 세로줄 수필선. 엄마에게 들킬까 두근대며 읽었던 포장지로 감싸인 책.
학년이 올라갔을 때는 둘째 언니가 친구들에게 빌려오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 같은 책들이 내게 전달됐다. 학업의 부담이나 부모의 기대로 자살까지 생각하는 인물들을 동정하기보다는 부러워하며 읽었다. 사람은 자신과 반대되는 상황을 늘 꿈꾸는 법이니까.
기대나 관심을 원하는 시기를 지나 부모의 관심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던 때는 신경숙의 <외딴 방>과 김형경의 <세월>을 읽었다. 두 소설 다 내게는 성장소설이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공>을 수업시간에 필사하다가 이과 계통의 담임에게 도대체 왜 그러느냐는 소리를 들은 것도 이 즈음이다.
마거릿 애트우드는 어린 시절 곤충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숲이 우거진 곳에서 생활한다.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도시와는 거리가 있어서 집에 쌓여 있는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낸다. 어린 시절의 상상력은 SF라 불리는 책들로 이어지고 비행하는 토끼나 공중에 뜨는 망토, 머리가 일곱 개 달린 식인 해양 생물과 가까워진다. ‘일상 세계와 분리된, 상상 속의 다른 세상’
마거릿 애트우드에게 SF로 분류되는 것들은 동심이라 불리는 어린 시절의 즐거움과 연결되는 듯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이야기로 가득한 나만의 작은 가게에서 우주 생명체들이 등장하는 책을 판매하는 것이다. 우주 생명체는, 어쨌든 간에, 내 어린 시절의 첫사랑이었으니까.”)
우주 생명체라든가 슈퍼히어로 같은 머나먼 존재들에 대해서 어린 시절도 그러했으나 지금도 나는 관심이 적다. 푹신한 의자, 보송보송한 이불, 살랑거리는 커튼. 부드러운 촉감을 가진 것들을 좋아한다. 실재적이고도 현실적이면서 안락함을 떠오르게 하는 것들을(반하는 사람 유형도 부드러운 천 같은 느낌의 사람이라는 것을 글을 쓰며 알았다.).
저자처럼 책이 많은 곳에서 자랐다면 어땠을까, 지금의 나와는 달랐을까. 박완서 작가님은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하지 않았다면(서울대 국문과 중퇴) 대중소설을 쓰지 않았을 거라는 글을 본 기억이 있다.
전쟁 중에 태어난 사람이 그때를 원해서 세상에 나온 것은 아닐 거다. 자신도 알 수 없는 커다란 흐름에 싸여 어떠한 선택을 하거나 하지 않으며 일생은 흐르게 된다. (‘살아간다’기보다는 ‘감당한다’가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힘이 닿는 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상황을 완벽하게 만들고자 하는 노력은, 특히 우리 자신을 완벽하게 하려는 노력은 하지 말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노력은 우리를 공동묘지행 길로 이끄는 듯하니까.”
삶이라는 것이 홀로 극복해가야만 하는 것들의 이어짐이라도 그것만은 아니라는 것을(그 안에서 이뤄지는 여러 의미들을) 책은 가르쳐준다. 동심과 연결되는 SF 적인 상상력은 내게 부족하더라도(어린이다운 시절이 짧았거나 부재했더라도) 지금도 여전히 책과의 관계는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 불완전한 그대로의 우리 자신에게 꼼짝없이 매여 있지만,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