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사적인 독서기록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보르헤스의 말)
소녀는 앞에 있는 사각형 반신 거울을 무표정하게 한참 쳐다본다.(거울에 비치는 소녀의 얼굴을 나 역시 한참 바라본다.) 열한 살, 혹은 열두 살쯤 돼 보이는 소녀는 쌍꺼풀이 없고 보통 크기의 눈에 피부가 구릿빛 혹은 초콜릿색이다. 어깨까지 오는 흑색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았다. 황토색에 무릎까지 오는 원피스를(인디언 복장을 생각나게 하는) 입은 소녀가 일어선다. 베이지색 인디언 텐트, 움막 같은 곳에서 밖으로 나간다. 움막은 언덕 꼭대기에 놓였고 소녀는 앞을 보며 걷기 시작한다. 소녀가 걷는 길이 위에서 비친다.(카메라로 보듯이, 영화를 보듯이 나는 소녀를 보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나선형 길이다. 아래로, 아래로 향하는. 소녀는 놀라지도 즐거워하지도 않는다. 가야 할 길을 간다는 얼굴 혹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소녀는 길을 걷는다. 어슴푸레한 저녁 혹 새벽 같은 때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혼자서.(소녀가 걷는 길이 끝없이 아래로 향하는 나선형 길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소녀는 모른다.)
안 돼, 소녀는 밝은 길을 걸어야 해. 나는 해를 만들었다. 밝게 날이 갠 아침 길,꽃도 있어야지. 나비도, 벌도. 나무도 있어야지 하다가 나는 소녀가 걷는 길을 숲으로 만들었다. 안락한 숲길에서는 사자나 늑대같이 공격적인 동물은 나타나지 않는다. 나무 위 다람쥐의 재롱을 볼 수 있고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귀여운 토끼는 볼 수 있겠지만. 길을 가다가 심심할 소녀를 위해 친구도 한 명 만들었다. 할머니 집을 찾아가는 빨간 망토 입은 앙증맞은 친구를. 무시무시한 내리막길 대신 소녀는 가뿐하게 걸을 수 있는 평지를 걷는다. 꽃향기와 나무 냄새가 진동하는 향긋한 길. 우울하고 지루할 끝없는 길 대신에 길 끝에는 이층 집이 놓여있다. 달콤한 쿠키향이 배어 나오는 푹신한 소파가 놓여 있는 집에 소녀는 곧 도착할 예정이다. 빨강 망토 입은 친구의 할머니는 소녀의 옆집이다. 둘은 함께 노래도 부르면서 외롭지 않게(보기 좋게)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을 거다.
끝없는 나선형의 길을 혼자 걸어야 하는 소녀를 외면하고 타인이 보기에 괜찮아 보이는 장치들을 하나씩 추가해가는 것이 아마도 내 삶의 방식일 거다. 보르헤스가 환상이라고 말하는 군중에 섞이기 위한 방법. 이 방법이 허망한 것은 자신과는 멀리 떨어져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장치라는 것에 있다.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장치들. 즐거운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들.
보르헤스를 읽는 것은 그동안 추가하던 이 장치들을 제거해 나가는 거다.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을. 굳은 생각들이 와해되고 언어의 세계, 문학이 쌓아 올린 곳으로 인도해 주는 손길을 보게 된다. 그를 읽는 것은 보지 못하던 세계에 가까이 가는 것이며 시간을 벗어난 무한한 세계로 걸어가는 거다. 그 안에서는 국가도, 국경도 (사람들이 정해놓은 어떠한) 경계도 의미가 없다. 그 안에서는 모두가 보르헤스다.
(실재를 걷는다 했지만 오히려 나는 환상으로 만들어진 길을 걸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미신을 따라서. 이것은 지극히 사적인 독서기록이다.)
“내 운명은 모든 것이, 모든 경험이 아름다움을 빚어낼 목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는 실패했고, 실패할 것을 알지만, 그것이 내 삶을 정당화할 유일한 행위니까요. 끊임없이 경험하고 행복하고 슬퍼하고 당황하고 어리둥절하는 수밖에요”
“우리는 뭔가를 느끼지 않고 뭔가를 발견하지 않아요. 그 순간 우리는 죽은 것이에요.”
“우리는 실수를 저질러야 하고, 실수를 이겨내야 합니다. 그건 평생 해야 하는 일이지요.”
“달을 언급할 수는 있지만 달을 규정할 수는 없죠.”
“기쁨은 해답이 아니라 수수께끼에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