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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하지 못하는 사람들

by 북남북녀

버려지는 아이에 관한 노래를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두 여성 가수가 진심으로 불렀다. 진심이라는 것은 버려지는 아이의 심정으로 부르는 것이라 여성 가수 둘은 생각한 듯싶다. 비장하게 부른 노래가 끝나고 심사위원들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한 심사위원의 평을 그대로 옮겨보자면


“이런 곡을 해석할 때 영화로 치면 연기자 역할을 하는 거잖아요. 여기서 최종적으로 연기자 역할은 그 시나리오에서 빠져나오는 거예요. 나와서 목소리와 노래만으로 전달을 하고 각자의 기억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어야 하는데 너무 깊게 그것을 구현해 내려는 게 조금은 무리였다 싶습니다.”


보르헤스는 공적인 자아와 사적인 자아를 나눈다. 공적인 자아는 언론 앞에 나서야 하고 사진을 찍어야 하고 인터뷰에 응해야 하고 어떤 것들에 대한 의견을 제시해야 한다. 꿈, 글쓰기, 느낌 같은 것들은 사적인 자아에 속한다.


공적인 자아는 ‘보이는 자아’다. ‘보이는 자아’에는 ‘보는 타인’이 포함된다. ‘나’를 바라보는 무수한 시선 속에서 ‘나’는 적당한 사람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두 여성 가수의 심사평은 공적인 자아가 드러나야 하는 곳에 사적인 자아가 두드러졌다는 뜻도 될 수 있을까.


보르헤스는 자신에게 현실은 사적인 자아라고 말한다. 공적인 자아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드러내야 하는,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비현실적 자아이다.

그러고 보면 보르헤스도 ‘보르헤스’라는 이름에 맞게 연기하고 있다.


진심이라는 것은 '연기'와는 다른 사적인 자아에 속할 듯싶고, 사적인 자아에 속하는 것들은 무한과 연결될 것도 같다. 꿈, 글쓰기, 느낌 같은 것들은 규정할 수 없는 것들이기에.(세상은 진심이나 느낌이 포함된 사적인 자아로 살아내기보다는 필요에 따른 공적인 자아의 ‘연기’로 살아내야 하는 곳 같기도 하다.)


보르헤스의 단편소설을 읽으며 미로에서 헤매는 느낌이었는데 보르헤스의 산문집 <만리장성과 책들>을 읽으니 그 근원은 책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의 이야기들은 실제 삶 속에서 나왔다기보다는 읽은 책들에서 흘러나왔다. ‘살아가기보다는 읽는 것으로 점철된 삶의 여정 속에서’.

그러기에 이해가 쉽지 않으면서도 읽다 보면 보르헤스라는 사람의 깨달음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다. 눈을 떠보니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곳에 있는 듯한 느낌.


보르헤스가 ‘보르헤스’라는 공적인 자아를 떨쳐내고 싶었듯이 나는 ‘나’라고 규정한 ‘나’를 떨쳐내고 싶었기에 그 느낌만으로도 충분히 값진 독서였다.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공적인 자아를 사적인 자아로 오인해 일어나는 감정들이 내 안의 부정적 감정들을 형성해 내지 않았을까 싶어서. 또는 사적인 자아를 공적인 자아로 내세웠던 상황들이.

(어떻게 시나리오에서 빠져나와 연기해야 하는 걸까 내게는 어려운 이야기다)


진심으로 노래를 부른 후 탈락한 여성 가수의 노래를 자주 찾아 듣는다. 덧칠하지 않은 목소리에 짧은 사랑의 아쉬움을 닮은 <그때 그 소나기처럼>이라는 노래를.




내 경우, 보르헤스와 나의 차이는 달라요. 보르헤스는 내가 몹시 싫어하는 모든 것들을 나타냅니다. 그는 언론 앞에 나서야 하고 사진을 찍어야 하고 인터뷰에 응해야 하고 정치적인 의견을 비롯해 여러 가지 의견을 제시해야 해요. 의견을 제시하는 건 하찮은 일이라고 말하고 싶군요. 그는 또한 실패와 성공을 나타내는데, 그 둘은 허깨비이자 사기에 불과한 거예요.

반면에 ‘나’는, 그러니까 이 글의 제목인 ‘보르헤스와 나’에서 ‘나’는 공적인 사람을 나타내는 게 아니라 사적인 자아를 나타내고, 또한 현실을 나타내지요. 왜냐하면 위에 언급한 다른 일들이 나에게는 비현실적이니까요. 현실적인 것은 느낌, 꿈, 글쓰기예요.

<보르헤스의 말>에서(104p)


도서: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보르헤스의 말>, <만리장성과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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